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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가 충격적이지요? 싱가포르의 가정 내 언어폭력 추방 캠페인 광고랍니다.
통보라는 것이 종종 언어폭력의 형태로 빈번히 이어지는 것이 현실인지라.
이런 점을 자각하고 상기하자는 의미에서 추가해 보았습니다.


대화는 상호적이다.
자신과 상대의 의견을 더불어 나누는데 있다.

그 가운데 서로간의 맥락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내가 알파이고 상대가 오메가라면, 알파와 오메가 사이를 만드는 과정이다.
내가 여기이고 상대가 저기라면, 여기와 저기의 사이공간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내가 과거이고 상대가 미래라면, 과거와 미래의 사이 바로 현재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자신의 것을 고수하지 않고, 상대방의 의견에 대한 열린 태도이다.
상대의 의견이 훨씬 지혜롭고 힘있고 도움되는 것이라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통보는 일방적이다.
자신의 의견을 상대에게 알리는 것뿐이다.

자신의 것은 무조건 수용되어야 하고, 상대방의 의견은 그것은 그냥 그것일 뿐이다.
상대의 의견은 적극적으로 무시되고, 각자가 결정한 사항을 서로간에 알려줄 뿐이다.

이 경우 우리 각각은 상대방의 결정에 따라 그것에 반응할지 말지를 검토할 뿐이다.
서로간에 창조적인 새로운 무엇인가는 나오기 힘들다. 아니 나올 수가 없다.

상대의 통보는 편하다. 우리는 그것에 따를지 말지만을 결정하면 되니까.
대부분 따르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타율성에 머물게 된다.
어차피 통보한 사항에 대한 책임은 상대에게 있을 뿐이므로.
내가 통보할 때도 똑같이 그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면서...


여기서 중요한 점은 ...
대화가 훨씬 낫고, 통보가 못하다는 뜻이 아니다.
대화를 한다고 옳은 것도 아니고, 통보를 한다고 잘못된 것도 아니다.

이것은 단지 대화는 그런 것이고, 통보는 이런 것이라는 하나의 의견에 불구하다.
( 하지만 보통 사회에서 이런 것을 "상식"이라고 명칭하고 있다. )


그렇다면 정작 무엇이 문제를 일으킬까?
일상에서 자주 발생하는 문제는 대화를 하는 척하면서 통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간의 마음을 나누는 것은 후차하더라도 말을 나누는데에도 미숙한 존재인지 모른다.
(고진재들은 말없이 모든 것을 알고 통한다 하였것만 ...)


이 지점에서 존재 차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탁월하고 화려한 대화술을 구사하더라도,
이를테면 청중을 사로잡는 법이나 여타 서적류에서 제시하고 있는 대화기법을 통달하더라도 말이다.
그러고 이것을 일상에서 활용하더라도 그 사람이 여전히 통보의 존재 상태라면,
자신은 그렇게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주변 사람들은 자신을 일방적으로 대할 것이다.
아마 이기적이고, 아주 가끔은 자기 중심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앞으로 제시할 것들은 대화의 기법이 아니다.
대화와 통보의 맥락에서 자신이 위치하고 있는 존재상태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충분히 자각되고 자신의 진실과 맞지 않는다고 여긴다면
그것을 바꿀 수 있는 하나의 여지를 제공하고자 한다.
( 무엇보다 "내가 될 기회"로써 이 기술을 시작하는 것이다. )

사실 일상에 대화와 통보라는 맥락이 있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산다.
왜 아니겠는가? 잠들어 걷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는 이 세상에서 ...
( 지금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깨어나고 있다곤 하지만 ... )


그래도 희망은 있다.
일상에서의 통보를 자각하는 것만으로 ...
자신의 통보와 대화를 분별해 냄으로써 ...
또한 통보하고 있으면서 대화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남으로써 ...

지금 여기에서 한 걸음은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삶이고, 누구나 바라는 삶일 수 있는 ...
진솔한 대화가 있는, 서로의 마음을 진심으로 나누는 ...
그러한 세상으로 ...


마지막으로 '대화와 통보'에 관한 이 글은 대화일까 통보일까?
이 또한 그 동안 공동체에서 논의된 대화와 통보에 관한 하나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다른 의견은 항상 환영... ^^ (댓글란이 열려 있습니다.)


다음 회에서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대화와 통보의 맥락을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