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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사랑과 다이몬
만약 악마들이 나를 버린다면. 천사들 역시 내게서 날아가 버리지 않을까 두렵다.
― 릴케, 심리 치료를 받고 나서 그 목적을 깨달았을 때. 편지74,
<1907년부터 1914년까지의 편지>(Brief aus den Jahren 1907 bis 1914)
“에로스는 다이몬이다.” 이렇듯 간단하고 직접적으로 플라톤은 ‘향연’에서 사랑의 깊은 차원에 관해 우리에게 그리고 그 향연에 참석한 벗들에게 알려 주고 있다. 에로스를 다이몬과 동일시하는 이 태도는 그리스인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겠지만, 현대에 있어서는 실제로 모든 사랑의 이론이 부딪히지 않으면 안 되는 걸림돌이다. 현대인이 이 모든 다이몬적인 영역을 공공연하게 부인하거나 억압하진 않는다할지라도 이를 회피하려고 하는 것은 확실히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향은 곧 에로스의 <거세>, 즉 사랑의 풍요로움의 원천이 폐쇄됨을 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이몬에 대립되는 극은 합리적 안전 무사나 편온 속의 행복이 아니라, <영혼이 없는 상태로의 복귀>, 프로이트의 용어로는 죽음 본능이기 때문이다. 반(反)다이몬은 곧 무감동이다.
1.1. 다이몬의 정의
다이몬이란 <한 인격 전체를 지배하는 힘을 지닌 어떤 자연적 기능>이다. 보기를 들면, 섹스와 에로스, 노여움과 분노, 권력을 향한 갈망 등이 바로 그것이다. 다이몬은 창조적일 수도 파괴적일 수도 있으나 보통이 두 성질을 공유한다. 이 힘이 왜곡되어 오직 한 요소가 모든 인격에 대한 통제력을 찬탈할 경우 우리는 이것을 역사를 통하여 정신 이상을 지칭한 전통적 명칭인 <다이몬 홀림>이란 말로 부른다. 다이몬은 분명히 실재물은 아니지만 인간 경험의 근본이며 원형적인 기능을 지칭한다. 그것은 골 현대인은 물론 우리가 아는 한 모든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실존적 실체이다.
다이몬은 자기 자신을 확인하고, 주장하고. 영속화하고, 확대하고자하는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충동이다. 다이몬이 모든 자아의 통합을 무시하거나, 또는 타인의 특유한 형태와 욕망 및 그들의 통합 요구를 무시한 상태에서 모든 자아를 빼앗으려 들 경우 다이몬은 악마성을 띠게 된다. 이때 다이몬은 엄청난 공격성향, 적대감, 잔인성 등으로 나타나는데, 우리들은 이러한 것들을 가장 두려워하면서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스스로 억제하려 하지만 대체로 타인들에게 발산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창조성에 힘을 부여한다는 주장의 반대 측면이다. 모든 삶은 다이몬의 이러한 두 단면 사이에서의 흐름인 것이다. 우리는 다이몬을 억압할 수는 있지만 이 억압에 의해 생기는 무감동과 그 이후에 폭발하려는 성향에서 오는 손실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이몬>의 (현대적 개념의 근원인)그리스적 개념에는 윤리 및 종교 지도자의 창조성은 물론 시인과 화가의 창조성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전염병적인 능력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황홀경, 즉 신성한 광란이 창조적인 사람을 사로잡는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천재와 광인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는 혼란만 야기하였을 뿐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 초기 형태이다.
소크라테스는 <다이모니아>(daimonia)를 오도하여 청년들에게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을 때 자신의 <다이몬>을 「변명」(The Apologia)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이 신호는 하나의 음성으로 내가 나이 어린 소년이었을 때 내게 처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소크라테스에게 유배와 사형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할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해 휴정이 선포된 후 법정이 재개되자 그는 재판관에게 자신이 죽음을 선택했노라고 통고한다. 그는 그러한 선택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재판관들이여 ― 나는 진정으로 당신들을 이렇게 부르고 싶습니다. ― 나는 여러분에게 경이로운 한 사실을 말해 주고 싶습니다. 그것은 내적 신탁의 원천인 그 신성한 능력이 지금까지 내가 어떤 일에서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경우에는,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나에게 줄곧 반대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번만은 내가 아침에 집을 나설 때나, 또 말을 하는 중에도 이 신탁은 아무런 반대의 신호도 보이지 않고 있답니다.‥‥‥ 이것은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선이며, 죽음이 악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선이 아닌 악을 지향했다면 늘 그랬던 것처럼 그 신호는 나에게 반대했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와 같이 그의 <다이몬> ― 그는 모든 사람이 이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었다 ― 은 일종의 감시자의 역할을 하였다.
다이몬은 양심이 아니다 왜냐하면 양심이란 일반적으로 사회적인 산물로서 문화적 관습과 그리고 정신분석학적 표현으로는 초자아의 능력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이몬은 초자아보다는 오히려 자연의 능력을 가리키며 선악을 넘어서 있다. 또한 하이데거와 그 이후에 프롬이 주장한 것처럼 다이몬은 인간의 <자신에로의 소환>도 아니다. 그것은 다이몬의 원천이 자아가 자연력에 뿌리박고 있는 그 영역 안에 있고 이 자연력은 자아를 초월하며 우리 운명의 결정자로서 감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이몬은 이러한 자아가 아닌 존재의 토양으로부터 발생하는데 이것은 특히 창조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다이몬에 대해 “저 다른 의지, 물과 불이 혼합된 것 같은 우리 자신의 존재의‥‥‥ 저 눈부시고, 예측되지 않고, 날개 달린 발을 가진 방랑자” 라고 한 예이츠의 정의를 결코 양심에 적용시킬 수 없다. 또한 괴테의 다이몬에 관한 말도 역시 양심에 적용될 수 없다. 다이몬을 지닌 사람들로부터 발산되는 <어마어마한 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는 “하나로 결합된 모든 도덕적인 힘도 그들과 싸워 승리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도전하여 투쟁을 벌였던 우주 그 자체 이외에 그 무엇에 의해서도 압도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이몬을 자신의 <유다이모니아>(eudaimonia 선(善) 다이몬, 행복) 윤리학의 개념으로 <길들임>이라는 개념에 가장 접근시키고 있다. 그리스어에서 행복, 즉 유다이모니즘은 “좋은 재능으로 축복을 받은” 결과였다. 행복은 자신의 다이몬과 조화를 이루면서 사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유다이모니즘>을 자신의 잠재력 및 다른 면들을 행동과 통합시킨 상태와 결부시킬 것이다.
다이몬은 특정 상황에서는 개별적인 지도 역할을 한다. 다이몬은 라틴어로
이러한 개념의 퇴보된 형태는 주위를 날아다니는 뿔 달린 작은 악마들에 대해 우리가 갖게 되는 믿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은 객관적 실재로 구체화된 내적 경험의 외향적 투영인 것이다. 모든 생활을 합리화시키는데 감격적인 성공을 거두었던 계몽 운동 및 이성의 시대에 사람들이 그런 믿음을 척결하고 정신질환에 대한 치료방법으로서도 퇴보적이고 비생산적인 것으로 간주했던 것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실재로 이 그릇된 <악마학>(demonology)을 버리면서 전반적인 정신질환에로 접근함에 있어서 우리가 우리의 의도에 반대되게 통속성과 천박성을 인정하게 된 것은 오직 최근 20년이란 기간을 통해서였다. 이러한 통속성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특히 사랑과 의지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었다. 왜냐하면 다이몬에 있어서 파괴적 활동이란 다만 건설적 동기의 뒷면이기 때문이다. 릴케가 재빨리 간파하였듯이 우리가 우리의 악마들을 내팽개칠 경우 우리는 또한 우리의 천사들에게도 작별할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바로 다이몬에 우리의 생명력인 에로스의 힘을 받아들일 우리의 수용력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곤궁한 처지에 적합하고 우리 자신의 시대를 위해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로 다이몬을 재발견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다이몬의 재발견에만 그쳐서는 안 되며 다이몬의 실재를 재창조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다이몬은 감독과 빠져나갈 통로를 필요로 한다. 이에 인간의 의식이 대단히 중요하게 된다. 우리는 맨 처음에 맹목적 충동으로서의 다이몬을 경험하는데, 이때 우리 자신이 본능의 도구가 되어 버린다는 의미에서 다이몬은 <비인격적>인 것이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격분하였을 때처럼 우리 자신을 맹목적으로 주장하거나, 또는 섹스의 경우처럼 여성에게 임신을 시킴으로써 인간이란 종(種)의 승리를 향해 치닫게 된다. 사람이 화가 났을 때는 내가 누구라는 것과 네가 누구라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다만 상대방을 때려 눕혀서 파멸시키기를 원할 뿐이다. 남자는 강렬한 성적 흥분의 상태에 놓여 있을 메 개인에 대한 의식을 상실해 버리고 그 여자가 누구이든지간에 관계치 않고 오로지 (이 동사들의 강제적 의미가 이를 분명하게 표현하듯이) 하게 하거나 또는 깔아 눕히기만을 원할 뿐이다. 그러나 의식은 다이몬을 통합하며 인격적으로 만든다. 바로 이것이 정신요법의 목적이다.
다이몬은 언제나 그 자신의 생물학적 근거를 지니고 있다. <파우스트>에서 웅변적으로 보여 주고 있듯이, 근대인의 다이몬적인 강한 충동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 그것에 영원히 매료되었던 괴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되풀이하여 “다이몬은 본능의 힘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는 항상 수반되는 통합의 와해이다. 즉 성격을 이루고 있는 한 구성 요소가 지배력을 탈취하고는 사람들이 분열적인 행동으로 나아가게끔 한다는 점이다. 보기를 들면, 에로틱한 성적 충동은 사람들이 자신의 짝과 육체적인 결합을 하도록 압박하는 데 있다. 그러나 전 자아가 그것을 지배할 때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통합과 상대방 자아의 또는 공동 사회의 통합에 상관없이 다양한 여러 방향으로 그리고 모든 종류의 관계 속으로 나아가게 할지도 모른다. 카라마조프가의 아버지는 어느 날 밤 술에 취한 동료들과 함께 귀가하던 중 개울에 빠진 백치여인과 성교를 하는데 그렇게 하여 그는 그 자신의 살해자를 낳게 된다. 그것은 다이몬의 면으로 볼 때 진정한 예술가적 본능을 지녔던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러한 성관계로 해서 태어난 아들이 후에 그 아버지를 죽이게끔 하였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다이몬이다”라고 연회에 참석한 플라톤의 친구 가운데 사랑에 대해 가장 권위자인 디오티마는 말하였다. 다이몬은 리비도나 섹스와 같은 것보다는 <에로스>와 관련되어 있다. 안토니우스는 아마도 자신의 성적 욕구를 여러 첩들을 두어 충족시켰던 것 같다.(이것은 매즈터즈와 존슨의 적절치 못한 표현에 의하면 “성적 긴장의 규칙적 해소”이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를 만남으로써 그를 사로잡았던 다이몬적인 힘은 매우 다른 것이 되었다. 프로이트가 에로스를 리비도에 반대되는 것으로, 그리고 그것의 적으로, 즉 죽음본능에 대항하고 삶을 위해 투쟁하는 힘으로 이야기하였을 때, 그는 그것을 다이몬을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다이몬은 죽음에 대항하여, 그리고 언제나 그 자신의 생명력을 주장하기 위해 싸우면서 나이가 <70>이라든가, 또는 그 밖의 인생의 시간표를 인정하지 않는다.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 투쟁을 포기하지 말라고 간청하였을 때, 또는 친구가 죽을 것이라는 징조를 그가 투쟁을 포기해버렸다는 사실로써 인정하게 될 때, 우리가 언급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다이몬이다. 다이몬은 합리적으로 내려진 <아니요>를 결코 대답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점에서 다이몬은 테크놀로지의 적이다. 그것은 시계 바늘에 의한 시간이나 꽉 짜여진 일정, 마치 로봇처럼 움직여야 하는 일관 작업 장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다이몬이 특별히 창조성의 형태로 나타난다면, 우리는 시인과 예술가가 이것을 가졌다는 지극히 명백한 증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시인들은 자신이 다이몬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아를 새로운 지평으로 밀어내는 심연으로부터 그 무엇인가를 완성해 내는 일이 문제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자각하고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모든 시인은 악마의 당원이다” 라고 말했다. 입센은 어떤 친구에게 <페르 귄트>(Peer Gynt)를 증정하면서 표지의 바로 다음 페이지의 백지에 이렇게 적었다.
사는 것은 가슴과 영혼으로
거인들과 전쟁하는 것.
쓰는 것은 앉아서
자신을 판단하는 것.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다음과 같은 선언을 통해 모든 시인을 위한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가슴 속에서 악마들과 신들이 영원한 전쟁을 하며‥‥‥
예이츠는 그의 수필에서 다이몬을 특별히 <다른 의지>라고 정의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는데, 그는 그것이 자신 밖에 있는 힘으로 동시에 그의 인격적 존재를 지향하게 된다고 믿었다. 다음은 이미 언급된 부분에 관한 완전한 인용문이다.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을 보고 예측했을 때에만 우리는 저 눈부시고 예측되지 않고, 날개 달린 발을 가진 방랑자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존재에, 그것도 단지 물과 불이, 침묵과 소음이 혼합된 것 같은 우리의 존재에 속해 있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난해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손쉽게 나타나는 것은 그것 만으로서는 도저히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감과 캔버스로 된 예술 작품과 조각가의 돌에서 훨씬 명백하게 나타나 있듯이 다이몬은 모든 종류의 예술가들의 일상의 동반자이며 영감인 것이다. 우리의 테크놀로지화된 사회에서는 예술의 영역에서만은 <다이몬을 초대>하여 그것과 동거하는 일이 용인되고 있으나, 그 밖의 다른 전문 분야에서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경우에 이를 수상한 눈초리로 보는 것 같다. 예술이야말로 현대인이 다이몬의 일부분이기도 한 자기 자신에 아첨하지 않고, 잔인하며, 소름끼치는 면들을 내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정말로 예술은 일면 다이몬의 심연과 관계를 맺게 되는 한 특수한 방법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피카소는 다이몬의 품 안에서 생활하고 그림을 그렸는데 그는 이에 대해 멋진 보상을 받았다. 즉 무방비 상태의 한 스페인 마을에서 독일 공군기의 폭격에 의하여 사지가 떨어져 나간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그리고 황소들의 참상을 보여 주고 있는 그의 작품 <게르니카>(Guernica)가 잊혀지지 않을 만큼 생생하게 다이몬을 나타내 주고 있으며, 다이몬에 의미 있는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다이몬을 초월하고 있다는 점이다. 뿔 끌레는 자신의 그림들이 한편으로는 아이들의 유희와 다른 한편으로는 다이몬적인 힘 사이의 변증법이라고 인식하고, 이 다이몬에 대해 자신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다이몬은 현대 예술 운동의 의식의 중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 세기의 20년대와 30년대에 마녀들, 악마들, 그리고 그로테스크(grotesque)한 인물들을 묘사한 초현실주의에 있어서 이러한 사실이 불을 보듯이 명백하게 표명되어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추상 예술은 화폭의 끊어진 공간으로 이것을 더욱더 정교하고 강력하게 나타내 주고 있으며, 그러한 공간들은 흔히 이목을 끄는 허무주의의, 초조하게 하는 색채의 긴장, 그리고 헌신으로 또는 온갖 재간으로 새로운 형태의 의사 소통 수단을 찾으려는 필사적인 노력 등의 효과를 주고 있다.
더욱이 우리는 20세기에 있어서 <원시>예술에 대한, 그것이 아프리카의 예술이든 중국의 예술이든, 또는 중부 유럽 농부들의 예술이든 간에, 서구인의 대단한 관심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에 다이몬을 직접 직면하였던 히로니머스 보쉬와 마티아스 그륀발트와 같은 화가들은 오늘날 특히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 비록 4세기 전에 그려졌지만 그들의 유화는 우리의 욕구와 진귀할 정도로 철저히 관련되어 있으며, 심지어 현대에 있어서까지도 우리들의 자아해명을 위한 거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습관적인 심리적 방어력이 약화되거나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사회의 전환기에는 다이몬이 속박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서게 된다는 것이 충분히 이해된다. 우리 시대의 예술가처럼 보쉬와 그륀발트는 중세기가 저물어가고 현대가 아직 오지 않았던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격동하던 혼란기에 살았고 또 그림을 그렸다. 그 시대는 마술을 부리는 사람들, 마법사들, 그리고 스스로 악마들과 교통하는 법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겐 실제적인 공포의 시대였다.
1.2. 용어에 대한 반대의견
다이몬이란 개념의 의미를 더욱더 고찰하기에 앞서 그 말에 대한 현대의 반론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렇게까지 다이몬의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은 그 개념의 본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표상하는 것을 부정하려는 우리 자신의 성향 때문인 것 같다. 이것은 우리의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심각한 타격을 가한다. 우리는 <훌륭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크라테스 시대의 교양 있는 아테네 시민들처럼 사랑의 동기가 권력에 대한 탐욕과 분노와 복수에 의해서 생겨날 수 있다는 사실을, 내심으로는 인정하든 하지 않던 간에, 공개적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다이몬을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책임감을 가지고서 삶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사용해야 할 것이냐 또는 맹목적으로 아무런 지각없이 사용해야 할 것이냐 하는 곤란한 딜레마에 부딪치게 된다.
다이몬은 억압당할 경우에 어떤 다른 형태로든지 <폭발>하려 할 것이다. 그것은 암살, 살인자들의 정신병적인 고문, 그리고 금세기에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다른 두려운 행위 등 극단적인 형태를 띨지도 모른다. 안소니 스토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잔학한 행위에 대해 신문이나 역사책을 읽을 때 비록 공포에 질려 움츠려들지 모르지단,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으로 우리 자신 안에 살인, 고문, 전쟁 등으로 나타낼 수 있는 그와 같은 야만적인 충동들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억눌린 사회에서는 그 시대의 다이몬적인 요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대신해서 사회 전체에 대해 잔학한 행위를 나타낸다.
우리가 다이몬을 잊고자 함은 사실이다. 1968년 1월 그해의 연두교서를 발표하는 도중에 존슨 대통령이 그의 정책 목표의 하나로서 거리에서 범죄와 폭력을 모두 없애겠다고 말했을 때, 열광적인 박수갈채가 터졌는데, 그것은 한 시간에 걸친 연설 중에 가장 길고 요란한 갈채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새롭고도 공정한 주택 정책과 인종 관계의 개선을 시정 목표로 내세웠을 때에는 전 국회 의사당에서 단 한번의 박수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다이몬의 파괴적인 면을 개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파괴적인 면은 바로 그 파괴력을 건설적인 황동으로 전환시킴으로써만 해소될 수 있다>는 사실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단지 미봉책만을 펴고 있을 뿐이다.
거리에서 깡패를 일소하는 이러한 모든 정열 앞에 주택 문제가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 우리는 뉴욕의 거리를 걸을 때 폭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뉴아크과 디트로이트에서는 격렬한 인종 폭동으로 충격을 받는 등 우리의 도시 구석구석에는 다이몬이 널려 있다. 아무리 많은 시민들과 국회의원들이 한결같이 흑인 민권 운동의 폭력을 개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제껏 상자 속에 갇혀서 억제되어 왔던 그 힘이 만일 건설적인 방향으로 풀려 나올 수 없다면 폭력적으로 폭발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폭력은 실패한 다이몬이다. 그것은 가장 경직된 형태의 <다이몬 홀림>이다. 우리 시대는 전환기에 해당하며, 이와 같은 전환기에서는 다이몬을 활용하는 정상적인 통로가 거부됨으로써 다이몬이 가장 파괴적인 형태로 표현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다이몬을 잊음으로써 자기 파멸의 결과를 가져 온 가장 좋은 보기를 히틀러의 등장에서 볼 수 있다. 이때 미국과 서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다이몬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히틀러와 나치스 운동의 의미를 평가할 수 없었다. 나는 1930년대 초 히틀러가 권좌에 등장하던 시기를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당시 나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유럽으로 건너가 교편을 잡고 있었다. 미국과 유럽의 동료 자유주의자들과 나는(유럽에선 미국에서보다는 덜하였지만) 당대에 있어서 평화와 세계의 형제애를 굳게 믿었던 까닭에 히틀러를, 즉 그가 표방했던 파괴적인 다이몬의 실재를 볼 수조차 없었다.
“문명화된 20세기에 인간이 정말 그 정도까지 잔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식의 표현이 논문에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잘못은 우리가 자신의 확신으로 인해 우리의 지각력을 제약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다이몬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으며 우리는 세계가 <우리의> 확신에 어떻게든지 스스로를 맞춰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모든 다이몬의 차원은 우리의 지각 대상에서 배제되었던 것이다. <다이몬 자체를 깨닫지 못한 결과는 다이몬적이 되고, 이로 인하여 우리는 다이몬의 파괴적인 홀림을 옹호한 공범자가 된다.>
다이몬의 부정은 결과적으로 사랑에서의 자아 거세이며, 의지에서의 자아 파기이다. 그리고 이 부정으로 우리는 우리 시대에서 자식들이 직접 목격하였던 그 변질된 공격 형태를 띠게 될 것이며 이러한 형태로서 억압된 자들은 우리를 역습하여 괴롭힐 것이다.
1.3. 원시적 정신요법에서의 다이몬
본래의 정신요법은 다이몬을 다루는 지극히 흥미롭고 계시적인 방법을 보여 주고 있다. 여러 해 동안 요루발란드의 원주민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들을 연구했던 정신병 의사 레이몬드 프린스 박사는 여기서 내가 보기로 들고 있는 매혹적인 의식(儀式)을 필름에 담았다.
부족의 정신 치료사가 우리가 심리학적인 질병이라고 부르는 것 때문에 몇몇 부족의 구성원을 치료하고자 할 때에는 모든 마을 사람들이 함께 참여한다. 뼈를 던지는 제식(祭式)과 환자의 병 ― 그것은 성불능이나 우울증 등이다 ― 을 염소에게 옮기는 것이라고 믿는 의식을 행하고 속죄양인 이 염소를 의식 절차에 따라 죽이면, 모든 마을 사람들은 다함께 수 시간 동안 광란의 춤을 추게 된다. 이 춤이야말로 치료의 주요한 부분이다. 이 춤에서 중요한 점은 <치료받기를 원하는 원주민은 자신을 지배하는 악령 빙의력(惡靈憑依力)을 지녔다고 생각되는 사람과 동일시된다>는 사실이다. 프린스 박사의 필름에서 성불능의 문제를 지니고 있는 한 남자는 자기 어머니의 옷을 입고서 <마치 자신이 어머니인 것처럼> 오랫동안 주위를 돌아다니며 춤을 추었다. 이것으로 우리는 이 원주민들은 남자의 성불능이 자기 어머니와의 관계 ― 표면상으로 그는 어머니에의 지나친 의존을 자신의 자아 체계 안에서 부인했지만 ― 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만큼 충분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치료>에 필수적인 것은 그가 그 자신 안에 있는 다이몬과 마주쳐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를 필요로 하고 거기에 매달리는 것은 누구에게나 경험의 정상적인 부분이며, 유아기에는 우리의 생존을 위한 절대적인 필수 요건이고, 그 이후로는 대부분의 우리의 자비심과 감수성의 원천인 것이다. 만약 그가 이러한 모성 집착이 너무 많다고 느끼거나 또는 어떤 다른 이유로 이를 억제해야 한다고 여겼다면, 그는 <그것을 밖으로 발산하는데 이때 사악한 역할을 하는 자는, 즉 그를 거세할 악마는 바로 그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여자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성불능이 되고 스스로를 거세한다.
가정하여, 이러한 남자가 여자들에게 정신이 팔리면 (여자들에게 <사로잡히게> 되면) 이런 망상을 떨쳐 버리려고 무진 애를 써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가 자기의 어머니를 특히 악마로 형상화시켰는지의 여부를 나로서는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악마>의 어떤 상징적 표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다이몬은 자신의 안에서의 자기 어머니와의 병적인 관계이다. 광란의 무도회에서 그는 <다이몬을 초대하고> 그녀를 환영한다. 그가 발끝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그는 이 악마와 마주칠 뿐만 아니라, 그녀(악마)를 받아들이고 그녀를 환영하며, 그녀와 동일시되고, 자신의 건설적인 부분으로서 그녀를 흡수하여 통합한다. 그리하여 그는 성적인 자신감과 능력뿐 아니라 남자로서 더 많은 부드러움과 감수성을 갖게 된다.
환자 치료를 위한 무도회를 찍은 프린스 박사의 필름에서 우리는 또한 스무 살 가량의 마을 처녀를 보게 된다. 그녀는 남성적 권위에 대한 문제를 갖고 있었고 스스로 이것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그 의식에서 그 지역의 영국인 인구 조사원의 모자와 외투를 입고 춤을 추었는데 그것은 분명히 권위에 대한 그녀의 다이몬적인 문제의 상징물이었다. 우리는 그녀가 치료를 위한 그 의식에서 황홀경을 체험한 뒤로 자기 자신의 권리를 더욱더 적극적으로 주장하게 되고 <생쥐같이 겁이 많은 여자>에서 탈피하여 권위 있는 남자들을 더 잘 다루게 되며, 성적인 사랑에서 반대감정병존의 상태를 벗어나 남자에 몰입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기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남자와 처녀는 모두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 즉 그들이 그때까지 그렇게도 완강하게 부정해 왔던 것과 대담하게 제휴하게 되었다. 이것에 함축된 원리는, 즉 <물리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당신을 괴롭히던 것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 안에서 거부된 어떤 요소를 표현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그 남자는 자신의 여성적 구성 부분과 제휴되면서 동성연애가 아닌 이성연애에 대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가 여자의 모자와 옷을 입고 춤을 추고 그 처녀가 그 관리의 모자와 재킷을 입고 춤을 출 때, 사람들은 가장 무도회의 필름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춤을 추는 마을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웃는 일이 없다. 그것은 그들이 그들 공동 사회의 구성원을 위한 중대한 의식을 치루기 위해 그곳에 모여 있는 것이며, 환자들이 사로잡혀 있는 그 황홀경의 상태에 모두 부분적이나마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처녀와 남자는 그들 집단의 후원으로 감히 다이몬을 <초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악마들>과 대면할 때 이웃과 친구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후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 남자와 처녀가 만일 그들 집단의 참여와 격려가 없었다면 어떻게 다이몬과 마주칠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집단 사회란 부정적인 힘과 투쟁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인간적으로 신뢰할 수 있고, 상호 인간적으로 관계하는 세계를 만들어 주고 있다.
우리는 이들 두 사람이 모두 우연히 어떤 이성과 동일시된다는 점을 또한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부정되고 있는 자아의 그림자가 이성을, 즉 남자의 경우에는 <아니마>(anima)를 여자의 경우에는 <아니무스>(animus)를 나타낸다는 융의 사상을 상기하게 된다. 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이 <아니무스>란 용어가 적대감, 거칠고 악의에 찬 의도, 즉 악의(animosity)라는 뜻과 <생명을 불어 넣다>(animate), 영혼을 넣어 주다. 기운을 북돋우다 등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용어들은 모두 영혼이나 정신을 뜻하는 라틴어 <아니마>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 다듬어진 이 말들에 담긴 지혜는 인간의 부정된 부분이 적대감과 공격성의 원천이기는 하나, 의식적으로 그것을 자아 체계 안으로 통합시킴으로써 삶에 활기를 불어 넣는 영혼과 에너지의 원천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우리는 우리가 지배하지 못하는 경우에 오히려 우리를 홀릴지도 모르는 것으로서 다이몬을 파악하고 있다. 다이몬 홀림을 극복하는 하나의 길은 솔직하게 다이몬에 직면하여 그것과 관계를 맺고 자아 체계 안으로 통합함으로써 지배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과정에는 몇 가지 유익한 점이 있다. 그것은 이제껏 버려져 온 것을 통합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아를 강화시켜 준다. 그것은 자아의 내부에 있는 마비성의 반대감정병존현상이라는 분열을 극복한다. 또 그것은 다이몬을 부정하는 인간들의 일상적 방어 수단인 자기 정당화와 외로운 고립 상태를 분쇄함으로써 사람을 더욱 <인간적>이게끔 한다.
우리는 이러한 치료법에 환자를 병적인 과거의 얽매임으로부터, 특히 그 남자의 경우에는 어머니에 대한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효과가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이것은 신화, 전설, 그리고 정신요법학의 경우에서 흔히 그렇듯이 악마들이 <여성>으로 이해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고대 그리스 분노의 신 푸리아와 고르곤은 모두 여성이다. 조셉 캠벨은 세계 신화에 관한 포괄적인 연구에서 모든 문화권의 신화 속에 나타난 다이몬으로 간주되는 여신들과 인물들의 기다란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 인물들이 대지의 여신들로 풍요와 관계된다고 믿었는데 그들은 <대지의 어머니>를 표상한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나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어머니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인생을 시작하긴 때문에 여성이 그렇게 빈번히 다이몬으로 여겨진다고 믿는다. 인간을 낳는 여자와의 이러한 <생물학적인 종속 관계>는 사람들이 만일 자신의 의식과 행동의 자율성을 개발하기 위해서라면, 달리 말해서, 자신을 소유하기 위해서라면 단지 그 탯줄 끝에 매달려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반드시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굴레이다. 그러나 이 생물학적 관계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그 자신의 자율성을 선언한 후에 사람들은 다시 이 다이몬을 자신의 의식의 지평으로 불러들여야 한다. 이것이 성숙한 인간의 건전한 의존 상태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두 학자들의 경험에서 이 책의 주제와 현저한 유사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한 환자는 성적인 사랑의 문제로 시작된다. 즉 그는 발기할 수 없었는데 결국은 타인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의지를 일으켜 세움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그래서 모성에의 수동적인 의존 상태를 극복하여 자신을 주장하게 되며, 성적 능력을 가지게 된다. 다른 환자<처녀의 경우>는 외견상 의지의 문제로 시작된다. 그녀는 권위적인 사람들에 대해 자신을 주장할 수 없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거침없이 남자를 사랑할 수 있게 되어 결국 문제가 해결된다. 이와 같이 사랑과 의지는 상호 연결되어 있다. 한쪽을 돕는 것은 바로 다른 한쪽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