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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명: 형과정-6 "운명~숙명"
●강의날: 2006년 4월 4일 화요일
●강의자: 주우님
●녹음시간: 26분 4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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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숙명

1. 강의의 목표

위치성에 따른 미시적, 거시적 관점 이해

자신의 삶을 의식적으로 창조하는...

현실에 접목 : 선택의 자유 - 책임

가. 관련 강의

변화 : 모든 것은 변한다.

인과 : 모든 사건은 연결이 되어 있음. CD-ROM 게임 비유

창조 과정 : 계획할 시 구상, 신성한 목적.

완벽 : 우주 자체가 결과,

신성한 이분법 : 운명 숙명은 동일 현상에 대한 다른 관점이다.

2. 개념

개인, 사회단체, 민족, 국가의 운명, 지구의 운명, 우주의 운명

체험 중심, 프로젝트, 매트릭스

가. 숙명 - 궁극의 운명

명이 머무른다(宿)(반복한다)는 뜻으로 숙명은 불변이다.

부모님, 형제, 태어난 환경 등의 숙명은 우리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다.

숙명은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에 평화가 오고 좋은 에너지가 나와서 부정적인 숙명의 에너지를 극복하고 행복으로 간다.

나. 운명

명이 움직인다(변한다)는 뜻으로 운명은 다변(여러 가능성)이다.

숙명이 아닌 모든 것은 운명이다. 운명은 만들 수 있다.

지금의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방향을 틀 수 있다.

다. 운명 숙명 비교

운명(運命) : 인사 - 진실 - 성지(誠之) - 時間과 空間과 人間에 의해 결정

숙명(宿命) : 천명 - 진리 - 성(誠) - 바꿀 수 없는 명(命)으로 누구나 동일

자각된 運命을 개척하고, 드러나지 않은(무지)한 宿命을 따르고 지킨다.

의식화된 운명 - 무의식적 숙명

드러난 세계 - 숨어 있는 세계

변화하는 세계 - 불변의 세계

1) 미시적 관점 - 거시적 관점

전체 모자이크, 완벽한 사건, 기대 없이 살라.

2) 인과 - 응보

응보의 두려움을 넘어 귀결을 자각 - 우주에 적응하는 존재

3) 필연 - 우연

신성한 목적 invisible hand

조화, 숙명적 작용

4) 창조론 - 진화론

매 순간 창조하는 것으로 진화(변화)하고 있다.

창조자 - 관찰자

변화 - 불변, 생성 - 존재

라. 골프 게임 - 시뮬레이션

여러 가지의 엔딩 : 이미 일어난 모든 일

게이머 : 창조자, 원인자 - (상호작용) - 게임 엔진 : 반응자, 결과물

게이머 동작에 반응할 모든 가능성이 이미 프로그래밍 되어 있음.

우주의 완벽성 : 우주의 시스템에는 엉터리, 버그, 오류가 없다.

3. 궁극의 운명

가. 결과가 정해지고 있다. - 존재 상태를 반영

여래(如來), 시간의 링, 도수(度數), 인생 회고

너희가 행복한 운명을 피할 길은 없다는 점을 이해하길 바란다. 너희가 "구원"받지 않을 길은 없다.

운명이란 우리가 이 가상의 지구에 오기 전에 미리 계획하고 설정한 환경, 사람 등의 사건들과 줄거리(연극과 연관지어 생각) - 대본, 연출자, 연기자

나. 심령술사

심령술사는 "미래를 예언한"predicted the future 것이 아니라, 단지 지금이라는 영원한 순간에 관찰된, "있을 수 있는 가능성들"possible possibilities 중 하나를 흘끗 보고 내놓은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누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읽는 것이야말로 심령술의 영원한 화두다. 그는 얼마든지 쉽사리 또 다른 선택, 예언과 일치하지 않는 선택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순간은 모든 "있을 수 있는 가능성들"을 포함한다. 지금 와서는 이미 여러 번 설명한 셈이지만, 모든 것이 이미 일어났다, 백만 가지 다른 방식으로. 남은 건 오직 너희가 어떤 인식perception을 선택하는 가뿐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인식의 문제다. 인식을 바꿀 때, 너희는 생각을 바꾸고, 생각은 너희 현실을 창조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너희가 기대|예상|예기할 수 있는 모든 결과가 이미 너희를 위해 거기에 있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인식하는 것. 아는 것뿐이다.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내가 대답해주리라"고 했을 때의 의미가 이것이다. 사실 너희의 기도는 기도를 내놓기도 전에 "응답 받는다."

다. 예언 - 예시

1) 심주(心柱) - 사주(四柱)

마음자리, 자기중심적, 기회 ~ 유비무환, 해뜰날

진단 치료 치유의 차이 : 진단하는 방식으로 치료하지 않는다. 진단 방식과 치료 방식은 다르다.

2) 추명학 - 운명 감별사, 와인 감별사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년, 월, 일, 시를 가지고 달력의 총 집합체인 만세력에서 오행을 산출해 낸다. 여기서 여덟 개의 글자를 뽑아낸 오행을 가지고 자연현상을 인용해 보기도 하고, 육친(인간관계)으로 추론하여 인간관계 및 사람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길흉화복을 알아내고 있는 것이 운명학의 이론이다.

 

사람들에게 사주 추명학으로 사람의 운명을 추측하며 적중시키려 하는 것에 그 친다면 결국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맞히는 학설로 남게 될 것이고 그것을 생업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점치는 사람의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상담자는 사람이 가진 문제를 파악하고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여 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길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3) 예상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는 없다. 물론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은 많지만.[시간의 Ring]

의도했는데, 예상치 못하는 경우가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역으로 예상치 않고서 의도하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너희가 영혼의 수준에서 의도하는 것은 언제나 너희의 현재 진화 상태를 꼭 그대로 반영하는 결말을 낳아, 너희 더러 「자신이 누군지」를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또한 다음 번 최고 상태로 나아가는 운동을 촉진하기에 꼭 맞는 결말이어서, 너희가 「되고자 하는 자신」이 될 수 있게 해준다. 삶의 목적은 너희가 지금껏 「자신」에 대해 지녔던 가장 위대한 전망의 다음 번 가장 숭고한 차원Version으로 너희 자신을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임을 잊지 마라.

 

내가 접촉하지도 못하는 의식 수준들에서 내 현실을 창조하고 있다면, 내가 뭘 기대해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너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기대 없이 살라」고 했던 것이다. 모든 조건, 모든 상황에서, 또 어떤 결과나 결말을 마주하더라도 「완벽을 보라」고 했던 까닭 역시 이것이고

 

4. 운명 개척

가. 운명 개척

환상 -> 자각 -> 재해석 -> 재창조 -> 재구성 -> 존재

패러다임 -> 마음 -> 행동 -> 태도 -> 습관 -> 운명

나. 도둑 탓에서 자신 탓으로.

◆ 네 인생을 「도약하게」하려면 먼저 그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아주 명확해져야 한다.

◆ 너는 자신의 인생이 정말로 「도약하길take off」 원하는가? 그렇다면 자신의 인생에 관한, 자신에 관한 생각을 바꾸어라. 「너이기도 한 신」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

◆ 네 삶이 「도약하길」 바란다고? 그렇다면 지금 당장 네가 되기 바라는 대로 네 삶을 그려보고 그 속으로 옮겨가도록 하라. 그것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 모든 생각, 모든 말, 모든 행동을 점검하라. 그런 것들에서 떨어져라.

◆ 초기 집단과 그들의 가르침에 영향받은 사람의 수가 결정적인 크기로 늘어날 때, 너희는 두 번째 단계의 변화를 시작하게 될 시대정신의 가속화, 즉 도약을 체험할 것이다. 이제 어른들이 자기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니, 이 시점부터는 진행이 매우 빨라지고 있다.

5. 신나이 구절

신이 창조한 것들의 완벽성을 인정하고 그 창조물들에 믿음을 보여라. 신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으며, 우연의 일치 같은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마구잡이식 선택이나. 너희가 운명이라 부르는 것들 역시 그 세계를 희롱할 수도 없다.

 

사건이란 건 너희가 선택해서 만들어낸 시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따라서 나는 그 선택들에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

 

Fate : 세상 모든 곳의 모든 생각들에서From All Thoughts Everywhere

 

그러므로 모든 사람과 모든 조건을 축복하고 그것들에 감사하라. 신이 창조한 것들의 완벽성을 인정하고 그 창조물들에 믿음을 보여라. 신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으며, 우연의 일치 같은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마구잡이식 선택이나. 너희가 운명이라 부르는 것들 역시 그 세계를 희롱할 수도 없다.

 

네가 일단 신의 의식으로까지 올라서게 되면, 너는 네가 책임져야 할 다른 사람의 영혼이란 없다는 것과, 모든 영혼이 평온하게 살길 바라는 건 칭찬받을 일이긴 하나, 각자의 영혼은 순간마다 자기 나름의 운명을 선택해야 하고 또 실제로 선택하고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될 것이다.

네가 할 일은 그들을 자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에게 너 없이 살아가는 법을,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완벽하게 가르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너를 필요로 하는 한, 너는 결코 그들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기에, 네가 그들을 진실로 축복하는 것은 오직 그들이 너를 불필요한 존재로 느낄 때뿐이다.

 

너는 너희가 행복한 운명을 피할 길은 없다는 점을 이해하길 바란다. 너희가 “구원”받지 않을 길은 없다. 이 사실을 모르는 경우만 빼고는, 어디에도 지옥은 없다.

 

너희에게는 너희 나름의 운명을 살 기회가 주어져 있다. 그 결과를 창조하는 건 너희 자신의 의식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이미 일어난 일이라면, 제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것은 운명 예정론인가요?

절대 아니다! 그런 회원권은 절대 구입하지 마라! 그건 사실이 아니다. 사실 이 “무대장치”는 너희를 도와주게 되어 있다. 너희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언제나 자유의지와 완전한 선택의 지점에 있다.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혹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해봐달라고 하는 것)은 원하는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너희의 능력을 제한하기는커녕, 오히려 높여준다.

어떻게요? 설명을 해주십시오.

만일 네 마음에 들지 않는 미래의 사건이나 체험을 “본다면”, 그것을 선택하지 마라! 다시 선택하라! 다른 걸 골라라! 원하지 않는 결말을 피할 수 있도록 네 행동을 바꾸거나 변경하라.

하지만 이미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피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네게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은! 너는  ‘시공간 연속체’ 속에서 그것의 발생을 의식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지점에 있다. 너는 그것이 “일어났음”을 “알지”못한다. 너는 네 미래를 “기억해내지”않았다! (이 잊어버림이 모든 시간의 비밀이다. 그 덕분에 너희는 삶이라는 위대한 게임을 “즐길 수”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자.) 네가 “알지”못하는 것은 “그런 식으로”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자신의 미래를 “기억하지‘ 못하기에, 그것은 ”네게“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일은 그것이 ”체험될“ 때만 ”일어나고“, 모든 일은 그것을 ”알“때만 ”체험된다“

 

너희에게는 너희 나름의 운명을 살 기회가 주어져 있다. 그 결과를 창조하는 건 너희자신의 의식이다.

 

너희는 지금껏 상상할 수 있었던 그 어떤 운명보다 더 장대한 운명을 타고났으니, 너희는 그 방을 치유하기 위해 그 방으로 왔고, 그 공간을 정화하기 위해 그 공간으로 왔다. 이것 말고 너희가 여기 있을 다른 이유는 없다.

 

너희가 신과 우정을, 도움되는 참된 우정을 나누고자 한다면, 너희는 신이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얻는 좋은 결과들을 끊임없이 기회니, 운이니, 우연의 일치니, 요행이니, 운명이니 따위로 불러왔다. 반대로 태풍이나 토네이도, 지진, 급사 같은 나쁜 결과들이라면 그건 신의 행위라 불린다. 이런 관념을 가졌으니 너희는 당연히 나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너희의 문화 전체가 이런 관념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것은 너희의 온갖 말들과 그것들을 말하는 방법 속에 반영되어 있고, 너희의 어법 어디에나 들어 있다. 이제 내가 말하노니, 너희가 좋은 일이라고 일컫는 것들 역시 신의 행위다.

 

나는 견디기 힘든 난폭한 운명에서 벗어나는 구원은 우리의 '있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되어 있느냐 아니냐to be, or not to be, 이것이 문제다. '참된 자신'으로 되어 있느냐, 아니면 그보다 못한 것으로 되어 있느냐, 추리의 선택은 이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아직 그 딜레마를 풀지 않으셨는데요. 제가 만물과 하나이면서, 모기를 잡아 죽인다면요?

너는 너희가 모기라 일컫는 자신의 일부에게서 어떤 종류의 변화를 만들어 내고 싶은 것이냐? 바로 이것이 네가 묻고 있는 질문이고, 바로 이것이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지혜의 의미다.

너는 전체 중에서 너희가 모기라 부르는 부분을 ‘바꾸고’ 있다. 알겠느냐, 너는 그 모기를 ‘죽일’ 수 없다. 생명은 영원하니, 너희는 그것을 끝낼 수 없다. 하지만 너희는 자신의 형상을 바꿀 힘을 가지고 있다. 너희의 공상과학 소설들에서처럼 너희는 자신을 변신술사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알아둘 건 모든 의식은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보면, 너희 중 하나가 상대방을 지배하거나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다. 신성의 측면들 각각이 신성 자체의 운명에 대해서 공동창조자로서의 통제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너희는 모기의 의지에 반(反)해서 그것을 죽일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모기 스스로가 그렇게 하기를 선택했다.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우주 자체의 동의를 받아서-다양한 형태로- 일어난다. 우주가 자신과 불일치할 수는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돈을 충분히 가진다면, 멋진 집을 사는 일을 할 수 있고, 그러면 소위 말하는 안정된 존재가 될 수 있다. 시간을 충분히 가진다면, 휴가를 즐기는 일을 할 수 있고, 그러면 소위 말하는 편안하고 활기 있고 느긋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권력을 충분히 가진다면,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일을 할 수 있고, 그러면 소위 말하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믿음을 충분히 가진다면, 신을 찾는 일을 할 수 있고, 그러면 소위 말하는 구원받은 존재가 될 수 있다.

6. 신인합일

삼라만상의 곡진이해에 무소불능.

모든 것에 온전한 앎의 상태.

네가 일단 신의 의식까지 올라서게 되면, 너는 네가 책임져야할 다른 사람의 영혼이란 없다는 것과, 모든 영혼이 평온하게 살길 바라는 건 칭찬 받을 일이긴 하나, 각자의 영혼은 순간마다 자기 나름의 운명을 선택해야 하고 또 실제로 선택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7. 운명론(運命論), 숙명론(宿命論)

이 세상만사가 미리 정해진 필연적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고 하는 사상.

결정론이 인간의 의지적 행위를 다수의 자연적 원인으로 돌리려고 하는 점에서 운명론과는 다르다. 개인은 공동적 개인조차도 어떤 종류의 사회적 사상(事象)의 흐름에 대해 아무런 영향력도 미칠 수 없다고 하는 입장을 사회적 운명론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개화되지 않은 존재가 자신이 미리 정해진 날에 죽도록 운명지어져, 사전에 어떠한 주의나 노력을 기울여도 이 재앙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숙명이 어떤 전능의 힘을 가지고 인사(人事)의 일체를 지배한다는 사상은 인간의 역사 속에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일찍이 그리스의 호메로스는 모든 인간사(人間事)를 신의(神意)에 종속시키는 비인격적 힘의 존재를 믿고 그것을 모이라라고 불렀으며 또 헤시오도스는 운명을 주관하는 3명의 여신에 관해서 말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모이라라고 불리는 이 여신들 가운데 인간의 탄생을 주관하는 클로토는 생명의 실을 뽑아내고, 라케시스는 모든 인간들의 생애를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며, 가장 연장(年長)인 아트로포스는 생명의 실을 끊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인의 일반적 신앙에 따르면 모든 인사관계는 운명을 주관하는 신들의 손 안에 있으며 운명이란 각자에게 주어진 이 세상에서의 ‘몫’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변경시킬 수도 또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운명관은 원시인의 신화나 전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 즉 운명의 힘이 어떤 초월적인 것으로서 의인화(擬人化)된 경우이다.

이것이 다소 관념화되고 한층 정리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 중국의 천명설(天命說), 인도(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 이슬람교의 선구적 시인이며 예언자인 아슈아의 종말론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은 모두 아담의 죄를 함께 하고 있다는 원죄관과 심판의 나팔이 울리면 이 세상은 파멸하여 신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종말론이 서로 결부되어 강한 운명론적 색채를 나타낸다.

운명에 관해서 철학적인 형태로 논술된 것으로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몇몇 단편(斷片)이 남아 있다. 또한 그리스 말기의 에피쿠로스파나 스토아파 철학자들이 운명에 관해서 꽤 활발한 논의를 한 듯한데 전자가 운명은 맹목의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그것으로부터의 탈출을 역설한 데 비해, 후자는 오히려 만물은 어떤 절대적 이성의 법칙에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 운명의 필연성에 복종할 것을 권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중세 이후의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형성된 사상으로서는 아우구스티누스 및 캘빈의 예정설(豫定說)을 들 수 있다. 이 사상은 사도 바울로의 서간에 그 원천을 두고 있어,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신이 미리 정했으며 신의 의지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와 같은 견해에 근거를 두고 의지의 자유는 제1의 인간, 즉 아담에게만 해당될 뿐, 그 이후의 인간들에게는 선(善)을 행할 자유가 아니라, 다만 악을 행할 자유(원죄)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의 말에 따르면 신앙조차도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의 은총이며 누구누구가 구제된다는 것은 이미, 그리고 영원히 예언되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豫定調和說)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세계를 형성하는 무한한 단자(單子:모나드)가 서로 독립적 존재를 유지하면서 서로가 단 하나의 우주를 비춤으로써 질서 있는 세계를 창조하는데, 이는 미리 이와 같은 조화적 질서를 배려했기 때문이라고 역설하면서 이를 예정조화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근세 이후에는 특히 운명론적 사상이라고 할 만한 것은 눈에 띄지 않으나, 세계사의 형태학이라고 하는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서양 문명의 필연적 몰락을 예언한 슈펭글러의 이론 등은 운명론적 사상의 두드러진 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 ‘영겁회귀(永劫回歸)’와 ‘운명애(運命愛)’를 역설한 F.W.니체, 땅 위에 사는 인간의 운명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베르댜에프, 인간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존재로 영원히 성취되어 있다고 하는 K.발트 등에게서 운명의 문제에 관한 뛰어난 고찰을 엿볼 수 있다.

8. 편집한 글

본래 나의 타고난 기운이 달라서 변화의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운명(運命)이라고 합니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남달리 운동에 소질이 있는 것, 이것은 운명입니다. 또 머리가 명석하게 태어난 것도 운명입니다.

이 운명은 완전히 바꿀 수는 없지만 그 사람이 어느 정도 노력하느냐에 따라 개발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운명개척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점은 자신의 기운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입니다. 처음에 나의 기운의 꼴이 이렇게 생겼더라도 나는 기운의 흐름을 제어하여 변화를 주도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숙명을 벗어나서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운명 개척 이란 숙명의 영향 속에서, 그리고 운명의 틀로부터 운명의 흐름을 점차로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명(命)은 태어날 때 타고나는 선천운(先天運)인 숙명(宿命)과 가변적 후천운(後天運)인 운명(運命)으로 나눠지는데 그 비율은 7대 3이라고 한다.

국어사전은 숙명을 '날 때부터 타고난 운명'이라고 풀었습니다만, 어원적으로는 그다지 정확한 풀이가 아닙니다. 숙(宿)자가 원래 '잔다'는 뜻이잖습니까? 그래서 '잠자고 있는 명령'으로 직역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잠재되어 있는 명령'이라는 뜻이지요. 언제나 가시화되어야 하는 사명(使命)과는 달리 숙명(宿命)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항상 지켜야 하는 명령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심지어 언급조차 되지 않더라도 지켜야 하는 근본적이고 변함없는 명령이 바로 숙명입니다. '거짓말로 속이지 말라'가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 숙명(宿命)에 충실하면 그 일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숙명이 원인, 사명은 결과라는 말입니다. 그 인과(因果)를 헷갈리지 말기 바랍니다.

 

숙명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경우에도 인력으로 바꿀 수 없는 생의 행로이며, 운명은 그것 자체로서는 인간의 삶을 이끌고 지배하지만 인간의 의지가 개입될 여지를 남겨두고 있어 그 과정에서 변화될 가능성이 있는 숙명의 연장선이자 실제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입니다.

 

'숙명'이란, 그 당사자가 태어나는 순간 그 사람의 개체성을 형성하는 시간적, 공간적 요소들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집약, 정리한 일정한 도식적 결과물로서 표현된다.

'운명'은, 시간축 중의 특정한 한 순간으로 대표되는 '숙명'을 기점으로 하여 일정한 규칙 하에 운행되는 '時空의 흐름'과 그 흐름이 그 개체에게 끼치는 다채로운 영향력의 향방을 일컫는다.

숙명의 존재와 그 위상에 대해서 여실히 깨닫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운명이라는 가상의 개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숙명의 본질이 가려진 상태에서만 운명이 진짜처럼 보이게 되는 이유는 개체의 시간에 대한 인식 양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운명이라는 가상의 범주 하에서 개체의 인식력 결여는 '미래'라는 미지의 개념에 대한 변화 가능성, 즉 개체의 선택과 행동에 따라 그 결과인 미래가 유동적으로 형성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그 믿음의 근저에는 '과거'의 선택이 지금의 '현재'를 낳고, 현재의 선택이 그에 따른 특정한 미래를 낳게 된다는, '실체로서의 시간'이 존재한다는 대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숙명이라는 필연적인 범주 하에서는, 모든 것이 우연적인 변화가 허용되지 않은 채 인과율의 예외 없는 주시 하에 흘러가고 있다는 인식이 충족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인식이 유지되는 한 그 개체에게 '가능성'이란 개념은 단순한 허상에 불과하고, 그러한 파악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시간은 그 실체로서의 의미를 잃는다.

숙명이라는 것의 속성상 특정한 과거는 오직 특정한 한 가지의 현재를, 그 현재는 반드시 특정한 한 가지의 미래로 이어지게 된다. 이 기가 막힐 정도로 매끈하고 일관적인 흐름은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축의 양극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며, 그 무한한 길이의 선분 - 물론 중간에 끊어지는 경우는 없지만 이 선분의 양태는 직선이 아닌 곡선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가끔씩 꼬이기도 한다 - 이 지닌 털끝만큼의 흐트러짐조차 허용하지 않는 일관성은 '예외'에 대한 가능성을 완벽하게 삭제한다. 그로 인하여 시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세계는 그 어떠한 변동의 여지도 없이 '스스로 그러한' - '自然'스럽게 - 방식으로 흘러갈 뿐이고, 그러한 인식 하에서 시간은 그 숙명의 일정한 흐름 안에서 매우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임의의 개체가 지니게 되는 '무한한' 숙명에 대한 인식력은 언제나 그 완전함을 기할 수가 없기 때문에, 空과 色을 동시에 접하고 있는 이 諸行無常의 세계에서는 항시 운명이라는 개념이 마치 실체로서의 영향력을 지닌 것처럼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虛像에 대한 것이든 實像에 대한 것이든, 개체의 믿음은 그 자체로서 현실을 형성하고, 또한 존재를 창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되고 창조된 모든 것들이 바로 色界를 구성하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서도 운명이란 것이 존재하는 한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 역시 존재하게 되고, 근본적으로 허상에 불과한 자유의지지만 그러한 믿음 하에서라면 인간들에게 실체로서의 주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되는 것이다.

운명은 존재하는가? 그리고 자유의지 역시 존재하는가?

존재한다.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던 이가 숙명의 절대성에 대한 여실한 인식을 하기 이전에까지만 국한된다. 그 이후에는, 그것들의 존재는 유지되지만 그 개체에 대한 의미와 영향력은 사라지고, 결과적으로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는 것이다.

 

첫째, 숙명(宿命)은 글자 그대로 생명(命)이 머문다(宿)는 뜻이다. 그것은 사람이 태어 나서 죽을 때까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의 틀이다.

둘째, 운명(運命)이란 숙명(宿命)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즉 사람이 생각하고 노력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셋째, 특성이란 숙명(宿命)과 운명(運命)이 만나서 이루어진 그 사람만의 독특한 개성으로 운명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옆에서 보거나 겪어 보았을 때 느껴질 수 있는 맛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숙명이란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특성, 운명이란 아무도 말릴 수 없는 특성, 특성이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특질이라고 볼 수 있다.

숙명. 운명. 특성 중에서 어렸을 때는 자기 정립이 안 된 상태이기 때문에 운명적 기운이 크게 나타나 보여 운명 70%, 숙명 30%로 나타나고 남자는 30세 여자는 25세를 전후하여 숙명 50% 운명 50%로 나타나고 특성은 100% 나타난다. 그 이후는 활동력이 감소되며 운명의 힘도 弱해져 60세 이상이 되면 도리어 운명의 힘은 30%로 줄고 숙명은 오히려 70%로 늘어나고 특성은 50%로 준다.

주어진 외부 환경의 기운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내가 변화하는 것을 숙명(宿命)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 이것은 숙명입니다. 현재의 부모님 밑에 태어난 것도 숙명입니다. 숙명은 이미 주어져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거부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기운의 흐름을 보다 풍요롭게 가꾸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숙명은 거역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