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상으로 올린 49제 -


경허의 천장암 생활은 숱한 일화로 점철되어 있다. 그 중 하나가 빈 상으로 지낸 49제가 있다.

어느 해, 천장암에서 49제를 지내겠다고 온 사람은 홍성 읍내에서 알아 주는 부자였다.
그가 49제를 지내는 날, 절 마당에는 숱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보통 49제 때는 그 집안과 관련된 사람들만 모여 지내는데, 그날은 인근 고을 사람들까지 모여 들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경허가 절에 사는 사미승에게 물었다.
" 아니, 이 절에 모여든 사람들이 모두 제를 지내러 온 사람들이란 말이냐?"
“웬걸요 스님, 부잣집에서 49제를 지낸다고 하니, 절 아래 마을 사람들이 제를 지낸 뒤에 음식을 얻어먹겠다고 모여들었습니다.”

당시 세간에는 가뭄이 계속되어 민간의 식량 사정이 극히 좋지 않았다. 더욱이 그 49제를 지내는 때가 바로 5월. 이때는 보리 이삭이 막 피기 시작하는 때로 하루 한 끼 밥을 먹기도 힘든 때였다. 그럴 때 부잣집에서 49제를 지낸다고 소문이 나자 절밥을 얻어먹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모여든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경허는 49제가 열릴 법당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온갖 음식이 수북하게 차려진 제사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한쪽에서는 제주를 비롯해 제사를 지낼 스님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경허는 부처님 앞에 차려진 제사상으로 가더니 음식을 모두 담아서는 법당 앞으로 가지고 나왔다.
“아니, 이것이 무슨 짓이요. 스님!”
놀란 제주가 앞으로 뛰어나오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그 소리에 상관치 않고 경허는 상 위에 차려져 있던 음식을 절 마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절 마당은 이내 음식을 받아먹겠다는 사람과 그것을 나눠주는 경허스님, 그리고 그것을 보고 놀라서 말리는 사람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제주를 비롯해 제사를 지내러 온 사람들은 마침내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경허에게 달려들었다.
“ 이 망할 놈의 중, 제사를 지내기도 전에 제사상의 음식을 나줘 주다니, 가만 두지 않겠다.”
음식을 나눠주던 경허는 그 소리를 듣고 제주를 향해 한 소리를 했다.
“ 이 제사가 누구 제사요?”
“ 우리 아버님 49제다. 그래 그것도 모르면서 네가 제사상을 무너뜨려!”
달려드는 제주를 향해 경허가 한 번 더 물었다.
“ 그럼, 그 아버님 49제를 왜 지내는 거요?”
“ 아버님이 극락왕생하라고 지내는 것이다. 중이 되어서 그것도 모르냐?”

그러자 경허가 목소리를 낮춰서 이야기를 했다.
“ 그렇다면 내 한 가지만 더 묻겠소. 49제는 죽은 망자가 시왕 앞에 불려가서 이승에서 베풀었던 공덕을 확인받는 날인 터, 시왕 앞에 불려가 재판을 받기 전에 망자의 공덕을 더하기 위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요. 그런데 그런 날 후손이 굶주린 사람들에게 음식을 펼쳐 놓고 제사를 지내서 원망을 쌓는 것이 좋겠소, 아니면 망자의 이름으로 보시를 하고 그 공덕을 더하여 확인을 받는 것이 더 좋겠소?”

불교에서 지내는 49제는 후손이 제사를 지내면 그 공덕이 죽은 사람의 공덕으로 돌아가서 살아생전에 쌓은 공덕으로 인정을 받는다고 한다. 자연 제사에 앞서 그 음식으로 배고픈 사람의 허기를 달래 주는 보시를 했으니 망자에게 더 유리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경허의 설명을 들은 제주는 머리까지 올랐던 화를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음식이야 제사를 지내고 나면 나눠주려고 했던 것. 그 것을 먼저 나눠주느냐 나중에 나눠주느냐의 차이뿐이지만 시왕 앞에서 재판을 받는 망자에게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날 천장암에서는 제사상의 모든 음식을 나눠준 뒤, 빈 상을 놓고 49제를 지내게 되었다.

경허의 이런 파격적인 행동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그의 파격 속에는 본말이 전도된 기존의 질서에 대한 예리한 성찰과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후손들이 자신들의 명예나 허명을 위해 성대하게 차리는 제사상보다 그것을 보며 원망하고 한탄하는 중생들의 신음에 먼저 귀를 귀울이고 해결하며 본래의 의미를 지키고자 했던 경허.

이러한 삶이 바로 깨달음 속에서 자비의 삶을 펼치는 보살의 세계임이 자명하지 않은가.


                                                   현대 선승들의 일화 ...합장-박기영엮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