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
글 수 39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5)“법만능이 직접정치 억압” “현정부 특정집단 ‘사당화’”
우석훈 경제평론가
ㆍ‘김상봉 - 박명림 서신대화’를 읽고
김상봉·박명림 서신 대화 ‘새로운 공화국을 위하여’가 전체 12개 주제 중 4개 주제까지 진행됐습니다. 두 필자는 공화국이라는 이념에 비추어 한국의 역사와 현실을 전반적으로 진단했습니다. 구체적인 현실 진단과 대안 제시에 앞서 김선욱 숭실대 철학과 교수, 경제평론가 우석훈씨로부터 그동안 실린 서신 대화에 대한 느낌과 제안을 들어봅니다.
“‘공화국의 꿈’ 기획 신선…뗄 수 없는 정치와 경제 ‘적절한 관계’ 고민해야”

얼마 전 MBC 라디오의 한 프로그램에서 “다시 태어난다 해도 한국을 선택할까?”라는 질문을 청취자 퀴즈로 냈다. 많은 대답들 속에 “한국만 아니라면 어느 나라에서 살아도 좋겠어요”가 있었다. 이 대답이 가슴에 사무쳤다. 요새 돌아가는 일들을 되생각해보면 이유는 뻔하다.
우리만 겪는 게 아닌 지금의 경제위기를 보더라도 그렇다. 정부 정책의 결실이 누구에게 이익이 될 것인지 빤히 보이는데 힘을 모아주고 싶을 리 없다. 재주 좋은 놈만 잘 살고 나머지는 닭 쫓던 개 마냥 될 것 같은 불안을 오늘의 중산층은 느낀다.
10년 전 환란시절에는 저축해 놓은 돈을 풀고 숨겨두었던 금을 모아서 위기 탈출의 기초를 닦았다면, 이제는 반쪽 난 펀드와 주식을 바라보며 카드빚, 대출금 상환 걱정에 그저 도망만 치고 싶을 뿐이다. 오른 기름 값과 텅 빈 지갑 탓에 서민은 자가용 몰고 나가기가 겁나는 때인데도, 전보다 거리가 한산해 운전하는 맛이 난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신날 수 있는 세상을 향해 이 나라가 나아가고 있다면, 도대체 국가가 뭔지를 근본적으로 따져 묻고 싶게 된다.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는 이 기획은 이러한 갈증에 생수가 되고 있다. 여덟 차례의 서신 교환을 통해 김상봉 교수는 철학적 철저함을 갖고 공화국의 참된 지반, 법과 권력의 진정한 의미 등을 촛불의 배경으로 분석해 주었고, 박명림 교수는 한국정치 현장에서 살아온 헌법의 정신과 정치적 요구사항을 현 정권의 근원적 한계에 대한 통찰을 배경으로 정리해 주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시대가 요구하는 사유에 근거한 문장을 내뱉고 있다. 학식에 근거한 논술이 아니라 현장에 뿌리내린 생각을 통한 웅변인 것이다.
이 기획에는 어려움도 따른다. 이 기획의 이름은 ‘꿈’이다. 물론 몽상이 아니라 이상을 의미한다. 제대로 기능하는 이상은 현실에 대한 상상력의 발휘로 형성된다. 있는 현실과 다른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다른 모습이 지닐 가치와 실천적 원리가 그 상상 속에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현실은 한편으로는 종교와 성적 취향의 차이와 같은 넘을 수 없는 다양성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배경과 경제력 등에 따른 당파성에 의해 파편화가 심화되어 있다.

그만큼 이 기획은 어려운 작업이 된다. 이 기획이 끝날 때 즈음에는 우리가 추구하는 공화국이 지녀야 할 일련의 가치와 다양한 원리를 머릿속에서 잘 정리해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바람 위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주문을 덧붙이고 싶다.
우선 두 분의 정치적 논의 안에서 경제의 자리를 잡아주어야 한다. 기업은 사익을 추구하고 정치는 공익을 추구하므로, 시장성과 경쟁이라는 기업적 원리가 공익과 조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를 지배할 때 파국이 이루어진다는 공통된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경제는 이미 정치 깊숙이 들어와 있다.
문제는 이 양자가 어떠한 적절한 관계를 맺느냐이다. 여기에 대한 공감할 만한 대안의 제시 없이는 정부의 경제부처와 금융계, 재계 등에 포진해 있는 경제 전문가들이 동의할 수 있는 공화국의 그림은 나오기 어렵다. 물론 이는 정답 없는 난제이지만, 그래도 아포리아 형식으로라도 지침으로 삼을 만한 길은 제시되어야 한다.
또한 민중의 직접참여와 대의제도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고민해야 한다. 두 분 모두 지금까지 글에서 한국의 정치사에서 자부심을 가질 만한 부분으로 민중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들었다. 구한말 만민공동회와 작년의 촛불집회 사이의 사건 리스트는 짧지 않았다.
사실 나는 어느 정치학자의 의견을 따라 고조선의 제천의식까지 소급해가고 싶을 정도이다. 민중의 직접참여가 한국 정치 문화의 한 특징으로 이처럼 분명히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대의제를 표방하는 법적 질서만을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지금 국회의원의 20%가량이 법조인 출신이다 보니 대의제와 법만능주의의 결합으로 시민의 직접참여행동은 억압받는 형국이 되어 있다.
물론 대의제는 효과적인 여론 수렴 절차이자 정치 수단일 수 있다. 따라서 직접참여가 한국의 정치문화의 저류를 형성하고 있다면, 우리의 입장에서 대의성과 직접성의 포괄이 가능한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도 이번 대화에 담겨야 한다고 본다. 한국적 상황에서 절차와 실질이 어우러지는 모델이 제시될 수 있다면, 그것은 세계인들에 대한 큰 기여도 될 것이다.
고종의 아관파천이 있은 지 석 달 후인 1896년 5월에 나온 ‘독립신문’에는 ‘헌 집을 새로 고치려면’이란 제목의 사설이 있다. 집을 고치는 데 중요한 것은 새로 사용할 지붕과 서까래를 준비하는 것이고, 또 지붕을 들어낸 다음 일시에 서까래를 교체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노이라트의 배 이야기도 있다. 항구를 멀리 떠난 배에서 큰 결함이 발견되었다. 항구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우리는 항해를 해가며 배를 수리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철학자 헤겔은 “황혼이 질 무렵에야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날기 시작한다”고 했다. 미네르바를 잡아넣을 수 있어도 지혜를 잡아넣을 수는 없다. 공화국의 꿈을 꾸는 두 올빼미가 날고 있는 지금은 정권의 황혼일 수는 있어도 나라의 황혼일 수는 없다. 어쨌든 우리가 고쳐 살아야 할 나라니깐 말이다.
<김선욱 숭실대 교수·철학과>
“관료 배신·자본 시대착오…지금 공화국은 ‘똥통’일뿐 ‘지금 여기’에 계속 주목을”

한국이 공화국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공적인 것, 그리하여 특정 집단의 전유물로 전락하지 않는 그런 국가에 대한 합의 정도는 있는 나라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민주주의라 표현하든, 대의제 혹은 절차주의라고 하든, 어쨌든 공화국의 형식을 갖춘 공적 영역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빨갱이는 무조건 잡아넣겠다고 한쪽에서 난리를 치고, 정몽준 의원의 말을 빌리자면 “이들은 극우파가 아니라 행동하는 우파”라고 하는 아스팔트 우파가 있더라도, 최소한 헌법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며, 이에 대한 표현의 자유도 보장하고 있다. 때만 되면 맹활약하는 국가보안법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절차적 자유는 보장하고 있는 나라다.
그러나 굳이 공화국이라는 표현을 빌리자면, 지금은 공화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순간이다. 전 세계적 금융위기 속에 한국이 유독 힘들어서, 원화의 절하폭이 OECD 국가 중에서 최고라서 위기인 것이 아니다. 한국이 자본 일반의 이해가 아니라 건설자본의 이해를 최고로 반영하는 ‘슈퍼 토건국가’로 진입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촛불집회를 비롯한 시민들의 상식적인 목소리를 물대포로 틀어막고, 아예 광화문 네거리에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의 행진을 가로막는 바리케이드를 공공연히 건설하는 경찰국가가 되었다고 해서 위기라는 것도 아니다.
지금 한국의 위기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경계가 무너지고, 사적인 것들은 모두 시장에 종속되고, 공적인 것들은 ‘사당화’되었다는 점에 있다. 고위 공무원들이 습관적으로 보고서를 속이고, 통계를 ‘마사지’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 물론 모든 관료들이 미필적 고의에 의해 사람들에게 착시를 일으키기 위한 노력을 하지만, 1차적인 기본 자료에 해당하는 것까지 왜곡해서는 안 된다. 경인운하의 경제성 평가는 작은 경우지만, 이런 허위의 빈도수가 너무 높아진 것 같다. 그런데 이것들이 ‘정권’이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히 통용되고, 또 이를 ‘충성’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지금은 튼튼한 관료제 위에 서 있는 공화국과는 너무 모습이 멀다.
행정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입법부는 공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한나라당은 청와대의 원격 지시를 받는 꼭두각시에 불과한데, 여기에 맞서는 야당의 모습은 어떤가? 야당 대표가 “주식도 떨어지고, 환율도 오르는데”라면서 여당과 법안들을 뒷거래하는 나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법부. 한국에서 사법부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진 것 같다. 미네르바의 구속에서 보듯이 지금 판사들의 결정에 대해 ‘적절하다’고 신뢰를 보이는 국민이 얼마나 있을까.
밀실 깊은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지켜보는 국민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최소한 한 가지는 안다. “저들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다. 상급의 심사자가 e메일을 보내고도 “이것은 협박은 아니다”라고 말하면, 그걸 어떻게 믿겠는가?
한마디로 지금의 공화국을 평가한다면, 이건 ‘똥통’이고, 특정 집단에 사유화된 그런 ‘사적 똥통’이다. 청와대는 통치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70% 이상의 국민들에게 신뢰를 잃은 한 가련한 사나이에 대한 ‘사적 구제’를 하는 곳으로 전락했고, 공화국이 가지고 있는 장치와 절차는 단 한 군데서도 견제와 균형을 찾아볼 수 없는 곳으로 몰락했다.
노무현 시절에 호사가들이 ‘삼성 공화국’이라는 말을 썼다. 그렇다! 그 시절은 삼성 공화국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공화국이었다. 최소한의 염치를 얼굴에 뒤집어썼고, 이건희 회장이 “삼성 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은 아니다”라고 얘기할 정도로 최소한의 외피는 걸쳤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공화국이 아니다.
“죽어도 전라도는 안 된다”는 지역주의, “박근혜는 여성이라서 믿음이 안 간다”는 뿌리 깊은 마초, “빨갱이와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역사적 아픔, 그리고 “설마 CEO가 못하겠어?”라는 시장 근본주의, 한국이 안고 있는 이런 중첩적인 모순이 이씨 형제의 시대를 만나 공화국을 절망으로 빠트린 셈이다. 여기서 누가 제일 큰 피해자일까? 한국의 ‘건전한 보수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 내에 한국의 보수는 수권능력이 없다는 완벽한 역사적 증명을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씨 형제의 실정은 오래가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러나 그 후에 한국 생태계가 공화국의 모습으로 복원될까? 어려워보인다. 그래서 ‘공적인 것(the Commons)’, 공화국을 위한 이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공화국을 전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시대에 세울 공화국의 기반을 위해서 말이다. “국가는 계급의 지배장치일 뿐이다”라는 그런 얘기는 하지 마라. 지금 이 공화국은 자본을 위한 복무도 할 줄 모르는 한 형제의 전유물에 불과한 것 아닌가? 공화국은 아주 규모가 큰 현대건설이 아니다.
김상봉 선생과 박명림 선생의 서신에서 국가 체제의 사당화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주셨으면 한다. 지금은 공화국의 사상적 전통을 논할 때가 아니라 관료들의 배신, 자본의 시대착오성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인문학이 위기인 것은 ‘지금 여기’라는 임재성이라는 질문에 학자들이 내어놓는 답이 없어서 그렇지 않은가? 두 분 선생님께서 임재성 있는 논의를 더 해주시기를, 투박한 경제학자가 부탁드리고 싶다.
<우석훈 경제평론가>
김상봉·박명림 서신 대화 ‘새로운 공화국을 위하여’가 전체 12개 주제 중 4개 주제까지 진행됐습니다. 두 필자는 공화국이라는 이념에 비추어 한국의 역사와 현실을 전반적으로 진단했습니다. 구체적인 현실 진단과 대안 제시에 앞서 김선욱 숭실대 철학과 교수, 경제평론가 우석훈씨로부터 그동안 실린 서신 대화에 대한 느낌과 제안을 들어봅니다.
“‘공화국의 꿈’ 기획 신선…뗄 수 없는 정치와 경제 ‘적절한 관계’ 고민해야”

우리만 겪는 게 아닌 지금의 경제위기를 보더라도 그렇다. 정부 정책의 결실이 누구에게 이익이 될 것인지 빤히 보이는데 힘을 모아주고 싶을 리 없다. 재주 좋은 놈만 잘 살고 나머지는 닭 쫓던 개 마냥 될 것 같은 불안을 오늘의 중산층은 느낀다.
10년 전 환란시절에는 저축해 놓은 돈을 풀고 숨겨두었던 금을 모아서 위기 탈출의 기초를 닦았다면, 이제는 반쪽 난 펀드와 주식을 바라보며 카드빚, 대출금 상환 걱정에 그저 도망만 치고 싶을 뿐이다. 오른 기름 값과 텅 빈 지갑 탓에 서민은 자가용 몰고 나가기가 겁나는 때인데도, 전보다 거리가 한산해 운전하는 맛이 난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신날 수 있는 세상을 향해 이 나라가 나아가고 있다면, 도대체 국가가 뭔지를 근본적으로 따져 묻고 싶게 된다.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는 이 기획은 이러한 갈증에 생수가 되고 있다. 여덟 차례의 서신 교환을 통해 김상봉 교수는 철학적 철저함을 갖고 공화국의 참된 지반, 법과 권력의 진정한 의미 등을 촛불의 배경으로 분석해 주었고, 박명림 교수는 한국정치 현장에서 살아온 헌법의 정신과 정치적 요구사항을 현 정권의 근원적 한계에 대한 통찰을 배경으로 정리해 주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시대가 요구하는 사유에 근거한 문장을 내뱉고 있다. 학식에 근거한 논술이 아니라 현장에 뿌리내린 생각을 통한 웅변인 것이다.
이 기획에는 어려움도 따른다. 이 기획의 이름은 ‘꿈’이다. 물론 몽상이 아니라 이상을 의미한다. 제대로 기능하는 이상은 현실에 대한 상상력의 발휘로 형성된다. 있는 현실과 다른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다른 모습이 지닐 가치와 실천적 원리가 그 상상 속에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현실은 한편으로는 종교와 성적 취향의 차이와 같은 넘을 수 없는 다양성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배경과 경제력 등에 따른 당파성에 의해 파편화가 심화되어 있다.

우선 두 분의 정치적 논의 안에서 경제의 자리를 잡아주어야 한다. 기업은 사익을 추구하고 정치는 공익을 추구하므로, 시장성과 경쟁이라는 기업적 원리가 공익과 조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를 지배할 때 파국이 이루어진다는 공통된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경제는 이미 정치 깊숙이 들어와 있다.
문제는 이 양자가 어떠한 적절한 관계를 맺느냐이다. 여기에 대한 공감할 만한 대안의 제시 없이는 정부의 경제부처와 금융계, 재계 등에 포진해 있는 경제 전문가들이 동의할 수 있는 공화국의 그림은 나오기 어렵다. 물론 이는 정답 없는 난제이지만, 그래도 아포리아 형식으로라도 지침으로 삼을 만한 길은 제시되어야 한다.
또한 민중의 직접참여와 대의제도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고민해야 한다. 두 분 모두 지금까지 글에서 한국의 정치사에서 자부심을 가질 만한 부분으로 민중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들었다. 구한말 만민공동회와 작년의 촛불집회 사이의 사건 리스트는 짧지 않았다.
사실 나는 어느 정치학자의 의견을 따라 고조선의 제천의식까지 소급해가고 싶을 정도이다. 민중의 직접참여가 한국 정치 문화의 한 특징으로 이처럼 분명히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대의제를 표방하는 법적 질서만을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지금 국회의원의 20%가량이 법조인 출신이다 보니 대의제와 법만능주의의 결합으로 시민의 직접참여행동은 억압받는 형국이 되어 있다.
물론 대의제는 효과적인 여론 수렴 절차이자 정치 수단일 수 있다. 따라서 직접참여가 한국의 정치문화의 저류를 형성하고 있다면, 우리의 입장에서 대의성과 직접성의 포괄이 가능한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도 이번 대화에 담겨야 한다고 본다. 한국적 상황에서 절차와 실질이 어우러지는 모델이 제시될 수 있다면, 그것은 세계인들에 대한 큰 기여도 될 것이다.
고종의 아관파천이 있은 지 석 달 후인 1896년 5월에 나온 ‘독립신문’에는 ‘헌 집을 새로 고치려면’이란 제목의 사설이 있다. 집을 고치는 데 중요한 것은 새로 사용할 지붕과 서까래를 준비하는 것이고, 또 지붕을 들어낸 다음 일시에 서까래를 교체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노이라트의 배 이야기도 있다. 항구를 멀리 떠난 배에서 큰 결함이 발견되었다. 항구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우리는 항해를 해가며 배를 수리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철학자 헤겔은 “황혼이 질 무렵에야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날기 시작한다”고 했다. 미네르바를 잡아넣을 수 있어도 지혜를 잡아넣을 수는 없다. 공화국의 꿈을 꾸는 두 올빼미가 날고 있는 지금은 정권의 황혼일 수는 있어도 나라의 황혼일 수는 없다. 어쨌든 우리가 고쳐 살아야 할 나라니깐 말이다.
<김선욱 숭실대 교수·철학과>
“관료 배신·자본 시대착오…지금 공화국은 ‘똥통’일뿐 ‘지금 여기’에 계속 주목을”

빨갱이는 무조건 잡아넣겠다고 한쪽에서 난리를 치고, 정몽준 의원의 말을 빌리자면 “이들은 극우파가 아니라 행동하는 우파”라고 하는 아스팔트 우파가 있더라도, 최소한 헌법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며, 이에 대한 표현의 자유도 보장하고 있다. 때만 되면 맹활약하는 국가보안법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절차적 자유는 보장하고 있는 나라다.
그러나 굳이 공화국이라는 표현을 빌리자면, 지금은 공화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순간이다. 전 세계적 금융위기 속에 한국이 유독 힘들어서, 원화의 절하폭이 OECD 국가 중에서 최고라서 위기인 것이 아니다. 한국이 자본 일반의 이해가 아니라 건설자본의 이해를 최고로 반영하는 ‘슈퍼 토건국가’로 진입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촛불집회를 비롯한 시민들의 상식적인 목소리를 물대포로 틀어막고, 아예 광화문 네거리에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의 행진을 가로막는 바리케이드를 공공연히 건설하는 경찰국가가 되었다고 해서 위기라는 것도 아니다.
지금 한국의 위기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경계가 무너지고, 사적인 것들은 모두 시장에 종속되고, 공적인 것들은 ‘사당화’되었다는 점에 있다. 고위 공무원들이 습관적으로 보고서를 속이고, 통계를 ‘마사지’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 물론 모든 관료들이 미필적 고의에 의해 사람들에게 착시를 일으키기 위한 노력을 하지만, 1차적인 기본 자료에 해당하는 것까지 왜곡해서는 안 된다. 경인운하의 경제성 평가는 작은 경우지만, 이런 허위의 빈도수가 너무 높아진 것 같다. 그런데 이것들이 ‘정권’이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히 통용되고, 또 이를 ‘충성’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지금은 튼튼한 관료제 위에 서 있는 공화국과는 너무 모습이 멀다.
행정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입법부는 공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한나라당은 청와대의 원격 지시를 받는 꼭두각시에 불과한데, 여기에 맞서는 야당의 모습은 어떤가? 야당 대표가 “주식도 떨어지고, 환율도 오르는데”라면서 여당과 법안들을 뒷거래하는 나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법부. 한국에서 사법부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진 것 같다. 미네르바의 구속에서 보듯이 지금 판사들의 결정에 대해 ‘적절하다’고 신뢰를 보이는 국민이 얼마나 있을까.
밀실 깊은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지켜보는 국민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최소한 한 가지는 안다. “저들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다. 상급의 심사자가 e메일을 보내고도 “이것은 협박은 아니다”라고 말하면, 그걸 어떻게 믿겠는가?
한마디로 지금의 공화국을 평가한다면, 이건 ‘똥통’이고, 특정 집단에 사유화된 그런 ‘사적 똥통’이다. 청와대는 통치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70% 이상의 국민들에게 신뢰를 잃은 한 가련한 사나이에 대한 ‘사적 구제’를 하는 곳으로 전락했고, 공화국이 가지고 있는 장치와 절차는 단 한 군데서도 견제와 균형을 찾아볼 수 없는 곳으로 몰락했다.
노무현 시절에 호사가들이 ‘삼성 공화국’이라는 말을 썼다. 그렇다! 그 시절은 삼성 공화국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공화국이었다. 최소한의 염치를 얼굴에 뒤집어썼고, 이건희 회장이 “삼성 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은 아니다”라고 얘기할 정도로 최소한의 외피는 걸쳤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공화국이 아니다.
“죽어도 전라도는 안 된다”는 지역주의, “박근혜는 여성이라서 믿음이 안 간다”는 뿌리 깊은 마초, “빨갱이와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역사적 아픔, 그리고 “설마 CEO가 못하겠어?”라는 시장 근본주의, 한국이 안고 있는 이런 중첩적인 모순이 이씨 형제의 시대를 만나 공화국을 절망으로 빠트린 셈이다. 여기서 누가 제일 큰 피해자일까? 한국의 ‘건전한 보수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 내에 한국의 보수는 수권능력이 없다는 완벽한 역사적 증명을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씨 형제의 실정은 오래가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러나 그 후에 한국 생태계가 공화국의 모습으로 복원될까? 어려워보인다. 그래서 ‘공적인 것(the Commons)’, 공화국을 위한 이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공화국을 전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시대에 세울 공화국의 기반을 위해서 말이다. “국가는 계급의 지배장치일 뿐이다”라는 그런 얘기는 하지 마라. 지금 이 공화국은 자본을 위한 복무도 할 줄 모르는 한 형제의 전유물에 불과한 것 아닌가? 공화국은 아주 규모가 큰 현대건설이 아니다.
김상봉 선생과 박명림 선생의 서신에서 국가 체제의 사당화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주셨으면 한다. 지금은 공화국의 사상적 전통을 논할 때가 아니라 관료들의 배신, 자본의 시대착오성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인문학이 위기인 것은 ‘지금 여기’라는 임재성이라는 질문에 학자들이 내어놓는 답이 없어서 그렇지 않은가? 두 분 선생님께서 임재성 있는 논의를 더 해주시기를, 투박한 경제학자가 부탁드리고 싶다.
<우석훈 경제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