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사랑과 죽음


나는 죽음과의 직면, 그리고 죽음의 일시적인 집행유예를 통하여 어느 때보다도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품어주고 싶을 만큼, 나아가 나 스스로를 그들에게 맡기고 싶을 만큼, 귀중하고 신성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경험을 했다.‥‥‥ 내게 강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던 적은 없다.‥‥‥ 죽음, 그리고 항상 실재하고 있는 죽음의 가능성은 사랑을, 정열적인 사랑을 더욱 가능하게 한다. 나는 우리가 결코 죽지 않으리란 점을 알 때에도 그렇게 정열적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인지, 진정 황홀경에 빠질 수 있을 것인지 의심스럽다.
― 에이브러함 매슬로우가 심장병 회복기에 쓴 편지에서

우리는 이제 사랑의 가장 십오하고 의미심장한 패러독스 가운데 하나와 직면하게 되었다. 죽음의 자각이 사랑에 대한 강렬한 개방을 가능하게 하고 동시에 사랑이 죽음에 대한 감각을 증대시킨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대지의 차디찬 심장부를 꿰뚫고 메마른 대지 위에 찬란한 초록색 초목을 솟아나게 했던, 모든 것에 생명을 부여하는 사랑의 신 에로스의 창조의 화살에도 <독이 묻어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 여기에 인간의 사랑이 불안을 창조하는 요소들이 있다. 에로스의 화살은 <온화한 심장뿐만 아니라 잔인한 심장까지도 꿰뚫어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또는 기쁨 가운데 치유되게 하기 때문이다>. 죽음과 기쁨, 고뇌와 환희, 불안과 탄생의 경이 등은 각기 인간의 사랑이라는 옷감의 씨줄과 날줄인 것이다.
<사족을 못 쓰게 만들고, 모든 신과 인간의 마음속의 생각과 약삭빠른 계획을 압도하는>자는 바로 사랑의 신 에로스라고 헤시오드는 그의 <신통기>(Theogony)에서 말하고 있다. 도시 국가의 출현과 자의식과 긍지가 강한 그리스인의 등장으로 그리스가 소용돌이치던, 대단히 창조적이었던 고대(BC 750년경)에 그렇게 썼던 것이다. 이성적 기능에 대한 <압도>는 이와 같이 사랑의 신 에로스의 창조력과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있다. 혼돈으로부터 형식과 생명을 창조하고 인간에게 생명력을 가져다주는 행위에는 지능과 <계산된 계획>을 초월하는 정열이 요구된다는 점을 <에로스는 모든 신과 인간의 손발을 못 쓰게 만든다.>라는 말보다 더 웅변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에로스는 창조하고 파괴한다.


1.1. 도덕의 암시로서의 사랑

사랑한다는 것은 환희, 만족, 그리고 우리가 전에는 그것이 가능했음을 알지 못했던 강렬한 의식 등의 긍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비통, 슬픔, 실망 등의 부정적인 것도 흔쾌히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먼저 이것을 현상학적으로, 그것의 한 모형으로서의 이상적 형태 안에서 기술하고자 한다.
우리가 사랑에 <빠질> 때, 그 감상적인 동사에 나타나 있듯이, 우리 주변의 세계는 스스로 드러나는 방식에서 뿐만 다니라 세계 안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경험에 있어서도 뒤흔들리고 변화한다. 이 흔들림은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면에서 기적과 신비를 동반하는 사랑이 갑자기 빚어 낸 경이로운 신천지로서 의식된다. 우리는 사랑이 해답이라고 노래한다. 진부하게 이것을 재확인하는 것은 별문제로 하고, 유럽 문화는 그것이 에로스의 <모든 것>이라는 환상을 강변하는, 필사적이긴 하지만 낭만적인 음모에 연루되어 있는 것 같다. 바로 이러한 환상을 지탱하려는 노력 자체가 억압된 것, 그에 대항하는 것의 존재를 드러내 준다.
대항하는 요소란 곧 죽음의 의식이다. 죽음이란 언제나 사랑의 기백의 그늘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희미한 그늘 속에 <이 새로운 관계가 우리를 파괴할 것인가?>라는 두렵고도 지겨운 의문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자신의 중심을 포기한다. 우리는 이전의 실존 상태로부터 공허 속으로 내던져지며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실존을 획득하기를 바라지만 결코 확신할 수가 없다. 아무 것도 이전과 동일하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계는 파괴되었다. 우리는 어떻게 세계가 다시 세워질지의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중심을 주고 그리고 포기한다. 우리는 어떻게 그 중심이 다시 획득될지의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깨어나 세계 전체가 뒤흔들리고 있음을 발견한다. 어디서 그리고 언제 이 세계는 휴식을 취하게 될 것인가?
가장 고통스러운 환희는 그만큼 강렬한 죽음의 긴박성을 수반하게 된다. 그리고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파멸의 경험은 내적인 것이며, 신화가 올바르게 표현했듯이, 본질적으로 <에로스>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타인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사랑하는 것은 모든 것이 파멸될 위협을 동반한다. 이러한 의식의 강렬성은 신과 합일되었을 때의 신비스러운 황홀경과 어떤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때 신이 거기에 존재하는지 여부를 그가 <확신>할 수 없듯이 사랑은 우리가 그 안에서 더 이상 안전을 보장받지 못할 의식의 강렬성을 가져다준다.
이러한 칼날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위기감, 이러한 불안과 환희의 아찔한 균형은 사랑의 자극적인 특성과 많은 관계가 있다. 그 두려운 환희는 단지 사랑이 같은 방식으로 되돌아 올 것인가 하는 물음에서 연유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사람 안에 내재해 있는 현실적인 변증법적 발전 때문에 사랑을 받는 사람이 정말로 반응을 보였다고 해서 불안이 본질적으로 가라앉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은 때때로 사랑을 획득하였을 때 더욱 불안해한다. 만일 누군가가 조건 없이 보상을 바라지 않고 사랑을 한다거나 (이러한 것은 몇몇 연애 소설이 한결같이 지향하는 목표이다)또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사랑한다면, 그는, 단테와 이탈리아 문학에 있어서 모든 스타일리스트들의 운동처럼, 자신의 <신곡> 또는 자신의 소네트 또는 소설 등을 저술하면서도 적어도 자신의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일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 파리스와 첼렌, 엘로이즈와 아빌라르의 경우처럼 에로스가 말 뜻 그대로 <사족을 못 쓰게 만드는>경우는 사랑이 실제로 실현되었을 때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은 사랑을 두려워한다. 따라서 그와 반대되는 달콤한 연애 소설들을 경계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보편적인 인간의 경험에서 죽음과 사랑의 이러한 관계는 사람이 아이를 가졌을 때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대체로 남자란 아버지가 되기 전까지는 죽음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용감함>을 자랑한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를 사랑함에 따라서 그는 잔인한 협잡꾼인 죽음이 자신의 사랑의 대상인 아이를 아무 때라도 빼앗아 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죽음에 대해 쉽사리 상처를 받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사랑은 매우 상처받기 쉬운 경험인 것이다.
사랑은 또한 우리의 도덕성을 환기시켜 주는 것이다. 우리의 친구나 가족이 죽었을 때, 우리는 인생이 덧없고 다시 반복할 수 없다는 사실에 압도되지만, 거기에서 또한 의미 있는 여러 가능성을 발견하고 과감히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자극을 받는다. 어떤 ― 아마도 대개의 ― 사람들은 누군가의 죽음에서 우정, 헌신, 충성의 귀중함을 경험한 뒤에야 비로소 깊은 사랑을 알게 된다.
에이브러함 매슬로우가 만일 우리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정열적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 했던 것 전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이것은, 신화적으로 말한다면, 올림포스 산의 불사신들 사이에서 일어난 사랑에 얽힌 사건이 왜 그렇게도 무미건조하고 지루한가 하는 이유의 하나이다. 제우스와 쥬노의 사랑은 그들이 죽지 않는 한 전혀 흥미가 없다. 제우스가 레다나 이오에게 내려와서 자신이 영원히 살 수 없음을 알기에 간절히 아이를 갖고 싶어 하던 가사적인 이 여인과 사랑에 빠졌을 때에 비로소 사랑은 역사의 진로를 바꾸어 놓을 수 있는 힘을 지녔던 것이다. 사랑은 가사성(可死性)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의해서 풍요해질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에 의해서 형성된다. 사랑이란 가사성(可死性)과 불가사성 (不可死性)의 상호 잉태이다. 그런 까닭에 사랑의 수호신 에로스는 신과 인간의 중간자로 기술되며 양자의 본성을 공유하는 존재인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어느 정도 개념적인 말로 이야기하여 왔다. 나는 많은 동료들이 이 정도의 연루를 신경병 증세로 부르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이 시대는 <냉담한> 관계의 시대이며 누구도 어떠한 순간에라도 결코 자신의 감정 표현을 억압할 정도로 연루되지는 않아야 한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이러한 연루는 오직 <동결된> 즉 고착된 경우에만 또는 상대방이 그들에게 이 수준에서 생활해야 할 것을 요구할 경우에만 신경증인 것이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내가 기술하고 있는 수준에서 살고 있지 않는 한, 그것은 일종의 배경이요, 또한 닥쳐올 단조롭고 지루한 날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관계되어 어느 곳엔가 있어야 하는 하나의 이상적인 상황이다.
문학에는 사랑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인상적인 내용이 있다. 이탈리아 작품에서는 모르테(morte) 즉, 죽음과 연관된 아모레(amore) 즉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사랑과 죽음의 관련성은 또한 본질적으로 생물학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수벌은 여왕벌에게 수정시킨 후에 죽는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마귀의 경우에 더욱 생생하게 드러난다. 암사마귀는 교접하고 있는 동안 수사마귀의 머리를 물어뜯는데 수컷의 단말마적 고통은 교접력을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한 교접시의 경련과 합일된다. 그리고 수정이 끝난 후에 암컷은 새로운 자손을 위한 자양분을 저장하기 위해 수컷을 먹어 치우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죽음의 위협과 에로스의 고갈을 관련지어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완전한 성적 만족의 조건과 죽음과의 유사성을. 그리고 하등 동물에 있어서 죽음이 교접 행위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설명하여 준다. 이러한 생물들은 생식 행위의 과정에서 죽는다. 그것은 에로스가 만족의 과정을 통하여 제거되어 버린 후에는 죽음의 본능이 자신의 목적을 자유로이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관점은 인간의 경우 죽음의 공포 ― 혹은 내가 앞에서 지적한 대로 가사성의 경험 ― 를 야기하는 것은 에로스의 고갈뿐만 아니라, 인간과의 모든 발전 단계에는 사랑과 죽음의 경험이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죽음과 사랑의 관계는 성행위에 있어서 분명히 밝혀진다. 모든 종류의 신화는 성행위 자체를 죽음과 관련시키고 있는데, 모든 요법 의사들은 환자들을 통해서 그 관계를 더욱 더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성행위 중에 아직까지 한번도 오르가즘을 경험해 보지 못한 한 불감증 환자가 이러한 섹스와 죽음의 주제를 극적으로 설명하여 주는 어떤 꿈을 나에게 이야기하였다. 그 꿈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처음으로 경험하였다. 그리고 꿈속에서 그녀는 왠지 강으로 뛰어들어 빠져 죽어야만 한다는 이상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꿈은 커다란 불만으로 끝나버렸다. 그날 밤 그녀는 성교에서 처음으로 오르가즘을 경험하였다. 이렇게 오르가즘에 필요한 자발성이 이루어지려면 사랑행위를 하는 동안 자신을 포기하거나 단념하는 능력이 반드시 요구된다.
이 여인의 꿈에는 매우 기본적인 것, 즉 죽음과 직면할 수 있는 능력, 성장애 뿐 아니라 자의식에도 필수 불가결한 능력이 생겨난 것이다. 나는 여기서 오르가즘을 자신을 버릴 수 있는, 더욱 심오한 경험으로 도약하기 위하여 현재의 안전을 포기하는 능력의 정신 물리학적 상징으로 여긴다. 오르가즘이 죽음과 재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자주 얘기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물속으로 들어가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난다는 신화역사를 통하여 다른 종교와 다른 문화에서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강 속에 잠기어 죽는다는 <세례>의 신화로서 전승되어 왔다. 이것은 새로운 존재를 성취하기 위하여 무(無)로 뛰어드는 것이다.
이제부터 모든 참된 사랑 경험의 순수한 특성을 살펴보자. 사랑의 경험은 모든 경우에 새롭게 보인다. 우리는 제 딴엔 비록 영원히 기억하겠지만 그 누구도 전에는 이것을 결코 경험한 적이 없었다고 확신하고자 한다. 내가 대학에서 이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을 때, 두 젊은이가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사랑을 하고 있는 자기들은 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지만 다른 학생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염려하였다. 나 이외에 누구도 결코 사랑을 하여본 적이 없으며 나도 전에는 그랬었다고 하는 이러한 생각은 모든 사랑의 과정에서 한결같이 드러나는 것이다.
여러 시대를 통하여 인간의 내적 경험과 세계에 관한 인간의 자기 해명을 드러내는 보물 창고인 신화는 불안과 죽음에 대한 사랑의 관계를 명료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신화가 가장 분명한 예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에 기댈 필요는 없다. 죠셉 캠벨은 에에게의 모든 역사 이전의 신화에 근거하여 아프로디테 여신과 그녀의 아들 에로스가 <바로 가장 위대한 우주의 어머니와 아들, 즉 끊임없이 사망하고, 끊임없이 생존하는 신> 임을 지적하고 있다. 에로스의 태생에 관한 모든 신화는 이러한 배경을 나타낸다. 캠벨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밤의 알에서 부화하였다. 그는 때로는 가이아와 우라누스의, 때로는 숲의 여신 아르테미스와 과학의 신 헤르메스의, 때로는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와 서풍(西風)의 신 제퍼루스의 아들로 등장한다. 이런 신화적 배경의 모든 변형은 예외 없이 우리가 지금은 잘 알고 있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주제의 목록을 보여주고 있다. 자발적인 희생자 ― 그의 죽음 안에 우리의 삶이 내재하고 그의 살은 우리의 고기요, 그의 피는 우리의 음료이다 ― 나 모든 사랑과 죽음의 원시적인 의식에서 황홀경을 느끼는 순간에 살해되어 그 몸이 성스럽게 구워져서 음식으로 제공된다는 젊은 한 쌍에 대한 이야기에 나타난 희생, 또는 수퇘지에게 살해된 아티스나 아도니스, 세트에게 살해된 오시리스, 타이탄에게 갈기갈기 찢겨서 구워진 뒤 먹힌다는 디오니소스에 관한 이야기에 나오는 희생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에로스(큐피드)와 그의 희생에 대한 후대의 매혹적인 우화에서 “신들은 흉악한 적 ― 습격하는 수퇘지, 흉악한 형제 세트 타이탄의 무리 ― 의 역할을 담당하고, 사랑하는 이는 육신으로 화한 죽어가는 신이다.”

캠벨은 고대 이집트 신화에서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가 살해자이며 희생자인데 비록 그 무대에서는 그들이 서로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을 소모하면서, 생명을 소생시키고, 창조하고 정당화하는 사랑의 극도의 신비에 있어서”, 하나의 마음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사랑의 기술에 대한 우리의 모든 욕구에 대한 해결로서의 사랑, 순간적인 자기실현으로서의 사랑, 만족으로서의 사랑, 통신 판매하는 한 기술로서의 사랑에 관한 우리의 재미있는 이야기와는 얼마나 다르게 인간의 사랑 문제를 설명하고 있는가! 우리가 에로스를 순수하게 생리학적 섹스로 환원시키려고 한다거나, 또는 에로스를 냉담하게 다룸으로써, 불만을 창조하는 에로스의 효력에 대하여 자신을 예방하기 위해 섹스를 이용함으로써 모든 딜레마를 피하려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떤 특별한 불안을 갖지 않고서 성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을 되는 대로 우연한 만남에서 행함으로써 우리는 궁극적으로 에로스를 잃어버리게 된다. 즉 단순한 관능을 위하여 정열을 연소시킴으로써 우리는 상상력이 풍부한 그 행위의 개인적인 중요성에 참여하는 것을 봉쇄당하게 되는 셈이다. 만일 사랑이 없이 섹스를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여러 시대에 걸쳐 인간의 사랑과 동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 알려진 다이몬적인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더욱이 만일 에로스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으로서 성행위 그 자체를 이용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불안에 대하여 철저히 방어하기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성적 동기는 결코 관능적 쾌락이나 정열이 아닌 한 정체성을 제공하고 안전을 보장하는 인위적인 것으로 대치된다. 그래서 섹스는 불안을 가라앉히는 한 전략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차후의 성불능과 불감증으로의 변화를 위한 토대를 구축했던 셈이다.


1.2. 죽음, 그리고 섹스의 강박 관념

죽음과 사랑의 관계에 또 다른 면이 있다. 섹스의 강박 관념은 현대인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덮어 준다. 20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조상들이 가슴에 품고 있던 불사성의 신앙 따위의 방패를 절대적인 공포에 대하여 거의 지니고 있지 않으며, 또한 보편적으로 일치된 생의 목적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 결과 오늘날 죽음에 대한 인식은 보편적으로 짓눌려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의 익살, 드라마, 경제생활에서부터 심지어 텔레비전의 상업 광고에 이르기까지 섹스에 대해서 엄청난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강박 관념은 어떤 다른 영역으로부터 불안을 고갈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싫어하는 것을 마주치지 않게 한다. 만일 섹스에 대한 강박 관념을 떨쳐 버릴 수 있다고 하면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섹스에 관한 외침으로 언제나 대기하고 있는 죽음의 존재를 묻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성불능에 대한 나의 내면적인 공포를 덮어서 잠재우려고 나의 실적 능력을 증명해 보이려 할 때 나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한 패턴을 다루게 되는데, 그것은 곧 죽음이란 극도의 성불능과 유한성의 상징이며 이러한 불가피한 경험으로부터 생기는 불안은 섹스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무한하게 확산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성행위란 죽음에 내한 내면적 두려움을 잠재우고 출산이란 상징을 통하여 그것을 이겨내는 가장 손쉬운 길이다.
죽음과 그 상징성을 억압하는 우리의 방식이 빅토리아시대에 섹스를 억압하는 방식과 같다는 사실은 놀랍다. 죽음이란 외설적이며,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것이며 도색적이다. 만일 섹스가 역겹다면 죽음은 역겨운 실수다. 죽음은 어린아이들 앞에서 이야기할 것이 못 되며, 가능하다면 전혀 이야기 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빅토리아시대의 여인들이 헐거운 의상으로 육체를 위장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기괴하게 채색된 상자로 장식한다. 즉 우리는 시신이 향기를 풍기게끔 하기 위해 관위를 꽃으로 치장하며 가식적인 장례, 매장, 환상적인 무덤으로써 어떻게든지 죽은 자가 마치 죽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며, 그리고 덜 슬퍼하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는 종교 심리학적인 복음을 설교한다. 심지어 우리의 경제 체제마저도 흡사 죽은 자가 죽지 않은 것처럼 그에 맞춰 모든 것을 짜놓고서 그 이전과 같은 상태를 기대한다. 어린아이들을 보호하는 것, 향수와 의상으로 위장하는 것, 가식적인 의식 그리고 내면적인 가식 이러한 모든 것은 빅토리아시대의 섹스에 대한 억압과 놀라우리만큼 유사성을 갖는다.
그러나 인간은 같은 양의 내적 불안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경험의 중요한 생물학적 또는 정서적인 면을 봉쇄할 수 없다. 우리는 강박 관념이 있는 곳에 어느 정도 같은 양의 억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죽음과 그 상징의 억압으로 야기된 불안은 어느 곳을 향해 가는가? 그것은 강제적인 섹스에의 몰입인 것이다. 죽음의 억압은 섹스의 강박 관념과 같다. 섹스는 우리의 생명력을 또한 우리가 아직 <젊고> 매력적이며 생식력이 있음을, 그리고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손쉬운 길이다. 이것은 궁극적인 형태로 자연에 대한 우리의 능력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희망은 사실 섹스와 출산이 우리가 죽은 후에도 생존하는 우리 자손들이 우리의 가문과 유전인자를 계속해서 보전하고 있음을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생물학적 바탕 위에 이해된다.
성욕에 대한 오늘날의 관심은 성욕에의 몰입으로 인해 성욕과 출산이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켜서 그가 죽는다는 것과, 실로 냉혹한 경험으로서의 죽음이 어느 때라도 다가올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를 없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생물학적 바탕을 훨씬 넘어서있다. 자연으로부터의 소외가 ― 소외의 궁극적인 상징은 원자폭탄과 방사선이다 ― 심하면 심할수록 우리는 사실상 죽음에 더욱 더 접근해있다. 이와 같이 원자의 분열이라는 형태로서 자연의 강탈은 우리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 공포를 항상 증대시키는 죄책감과 그리고 그 결과 죽음의 의식을 억압해야 한다는 팽창된 욕구와 관계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모성 상징이 논의의 대상이 됨으로써 우리는 모성에 관해서 이야기하게 된다. 그것은 <영원한 여성>을 지배하는 것으로서 원자의 분열을 경험하는 것과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원자폭탄은 우리로 하여금 모성과 갈등을 빚게 하였다. 그러기에 폭탄의 제조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개인적인 상징력을 갖는 것이다. 유럽인들이 어느 정도 깊은 내면으로부터 많은 죄책감을 지니고 있다는 징후를 보이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의식을 억제하려는 충동은 <능력의 신화>에 대한 신뢰 때문에 유럽인들에게 특별한 강도로 다가왔다. 나는 <신화>라는 용어를 허위라는 타락된 통속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경험에 의미와 방향을 제시하는 정신 생물학적 모형의 정확한 역사적 의미로 사용한다. 능력의 신화는 르네상스 이래로 유럽인의 정체성(주체성)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여 왔고, 특히 그들의 심리적 그리고 정신적 성격을 형성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자연과학과 산업에 있어서 그렇게도 깜짝 놀랄 만한 발전을 가져왔던 유럽인의 자연에의 몰입은 20세기에서는 인간존재에까지 확산되었다. 그 이래로 우리는 스스로를 조정함으로써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조정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진정으로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없고, 실제로는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 된다. 우리 자신은 조정당하고 활성력이 없는 살아 있는 물체의 덩어리일 따름이다.
다른 것의 조작과 마찬가지로 자기조작(self-manipulating)은 결코 능력을 증가시키지 않고 오히려 능력을 손상시킨다. 우리는 항상 우리 배후에 있는 어떤 능력자나 기준 즉 조작자를 예상한다. 그러나 그 체계가 확장됨에 따라 <막후의> 인물이나 기준의 정체성은 무한히 퇴보하는 가운데 상실되어 간다. 이 통제자의 통제 행위는 혼동을 일으킬지 모르지만 현실적인 문제로서 부정적인 의미에서 스스로 다이몬의 성격(악마성)을 띠게 될 때까지는 언제나 뒤로 이동해간다.
개인적 능력에 대한 신화는 사실상 개척지의 변방에서 ― 그것이 경제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또는 지리적인 것이든지 간에 ― 자라온 미국인에게 특히 과대하게 강조되어 왔다. 그 보기로 서부의 개척지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는 것과 격렬하고 활동적인 육체적 힘을 기른다는 것, 그리고 총을 뽑는 동작을 더디게 할지도 모를 나약하고 감상적인 감정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활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프로이트는 빳빳하게 치솟아 오를 때만 사용할 수 있는 남근의 상징으로서의 총이 비엔나에서보다는 미국에서 더욱 관련성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언급하였는데 이것은 사회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몇 안 되는 특별한 문학적 상징 가운데 하나이다.
헤밍웨이의 생애와 이야기는 개척 시절부터 전해온 남성적 능력의 여러 덕목 ― 육체적 힘, 사냥, 성적인 무용담(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자신의 성적 불능에 대한 실재적인 투쟁과 그것의 공포에 대한 보상이다) 그리고 그의 저술에 있어서 활동적인 주제와 스타일등 ― 을 생생하게 묘사해 준다. 그러나 죽음과, 그리고 그 누구도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즉음 앞에서 살아간다는 견딜 수 없는 불안이 그가 60대 중반에 성적으로 무능하게 되자 그를 더욱 강력하게 짓누르는 위협으로 변하면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을 내보이는 수단으로써 사람이 할 수 있는 극단적인 행동, 다시 말하면 자살로 치닫게 하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능력의 덕목에 매달려 그것에 의지하는 한 죽음 앞에서 웃을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이러한 강점을 잃어버리면 죽음과 그것의 점진적이며 굴욕적인 승리를 받아들이든가 또는 헤밍웨이가 하였던 것처럼 정면으로 돌진하여 죽음을 만나는 선택밖에는 없는 것이다.
섹스와 죽음은 그것들이 거대한 신비의 두 생물학적 면이라는 사실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신비 ― 여기서는 관찰된 사실들이 그 문제와 상충하는 한 상황으로서 정의되는데 ― 는 이러한 인간의 두 체험 안에서 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둘은 창조와 파괴에 관련되어 있는 까닭에 그것들이 인간의 경험에서 그처럼 복잡한 방식으로 뒤얽혀있다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못 된다. 양자에 있어서 우리는 한 사건을 떠맡게 되는데 그것은 곧 우리가 사랑과 죽음 가운데 그 어느 것에서도 자신을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이며, 만일 그렇게 하고자 할 경우 그 경험이 갖고 있는 모든 가치를 파괴하리라는 것이다.


1.3. 사랑에 있어서의 비극적 의미

나는 친구이자 유명한 정신요법 의사인 한 동료와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적 의미에 관한 토론을 회상해 본다. 나의 친구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충은 그들에게 적절한 상담자가 없었다는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만일 그들에게 상담자가 있었더라면 그들은 자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말에 당황하여 나의 생각으로는 그것은 전혀 셰익스피어의 견해가 아니며, 그리고 여러 시대를 통하여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문학 작품을 창작하였던 다른 고전 작가들도 물론이거니와 셰익스피어도 이 작품에서 한 쌍의 남녀가 성적 사랑으로 인하여 어떻게 얽히고 절망과 환희 ― 이것들의 동시적 공존을 우리는 비극이라고 부른다. ― 의 늪 속으로 던져졌는가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여 이의를 제기 하였다.
그러나 나의 친구는 비극이 부정적인 상태이며, 우리는 과학적인 계몽으로써 이제까지 그것을 교체하여 왔는데 아직도 그렇지 않다면 가능한 가장 빠른 시기에 그렇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단순히 부정적인 관계에서만 비극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오해라는 점을 그와 토론하였다. 비극이란, 삶과 사랑의 부정이기는커녕 성욕과 사랑에 대한 우리 경험의 고결하고 심오한 한 단면인 것이다. 그 비극의 올바른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생에 있어서 지나친 단순화를 피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특히 섹스와 사랑이 정신요법에서 통속화될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물론 <파국>의 통속적인 의미에서가 아닌, 환희와 파괴를 동시에 가져온다는 자의식적인 그리고 직접적인 체험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비극을 다루고 있다. 나는 이에 관련하여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주지되어왔으나 우리의 시대에 와서 놀랍게도 망각된 하나의 사실, 즉 성적인 사랑은 당사자 자신뿐 아니라 많은 다른 사람들까지도 동시에 파멸시킬 수 있는 상황으로 사람들을 휘몰아가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려 한다. 우리들은 헬렌과 파리스, 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신화를 상기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것은 그것들이 역사적 인물에 근거하든 하지 않던 간에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사로잡아 이성적 자제력을 거부하고 파괴하는 회오리바람 속으로 내팽개쳐 버리는 성적인 사랑의 힘에 대한 대표적인 신화적 표상인 까닭에서이다. 이 신화들인 유럽의 고전 문학에서 되풀이되면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져 내려온 것은 다만 우연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섹스와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 저술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무시되고, 성적인 사랑에 있어서 인간들이 체험하는 신화적 혼돈으로부터 그 줄거리들이 유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극이란 인간의 삶에 풍요와 가치, 그리고 존엄성을 주는 의식 차원의 표현이다. 비극은 고대 그리스적 의미에서의 연민, 친구에 대한 동정과 이해 등 가장 인간적인 정서를 가능케 할 뿐 아니라 만일 그것이 없을 경우 사랑은 사카린과 같이 그저 달콤하거나 무미건조하게 되어 에로스는 병들어서 결코 자라지 않는 어린아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독자는 이에 이렇게 반대 의견을 내세울지도 모른다. 비극의 고전적 의미가 무엇이든지간에 오늘날의 예술에 있어서 이른바 비극적 표현은 그것이 무대위에서건 소설의 책갈피에서건 아무런 의미 없는 묘사가 아닌가? 우리는 오닐의 <얼음장수 코메트>에서 인간의 위대함과 존엄성의 결여를, 그리고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인간의 공허감을 보지 않았던가?
그 말에 대해서 나는 두 가지로 답변을 하겠다. 첫째로 이 작품들은 인간에 있어서 그리고 그의 행위들에 있어서 위대함과 존엄성의 <외면적인> 결여를 또는 의미의 결여를 표현함으로써 무한히 많은 것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바로 우리 시대의 비극적인 것에 다시 말해서 도덕적 기준들의 완전한 혼동, 평범화, 애매성, 공백 상태에, 그리고 그 결과 행동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또는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서처럼 자기 자신의 연약성에 대한 마비될 정도의 공포감에 직면해 있다. 사실 우리는 <얼음장수 코메트>에서 위대함이 인간에게서 달아나 버렸다는 것을 보았지만, 그것은 이미 하나의 위대함, 하나의 존엄성, 또 하나의 의미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오레스테스가 자기의 어머니를 살해했을 때 고대 그리스 청중들은 그것이 그 자신들에게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월리 로먼의 아내가 “주의를 기울여야만 해”라고 항변한 것은 전적으로 옳은 말이었다. 그 말은 설혹 그가 다만 떠돌이 세일즈맨이라 할지라도 그가 파멸될 경우 그것은 <실제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에는 오레스테스의 모친 살해 행위가 왜 그렇게 의미심장한가를 청중들에게 설명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러한 살해가 전혀 복수의 여신 푸리아와의 무서운 싸움을, 그리고 그 이후에 죄책감, 책임감, 용서 등에 관한 시련을 불러일으키는 문제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걷잡을 수 없이 저질러진 심리적이며 반(反) 오이디푸스적인 메커니즘이라고 배운 세대이기 때문이다.) 나의 판단으로는 우리 시대에 가장 훌륭한 소설, 희곡, 회화는 무의미성에 직면한 우리들에게 커다란 의미를 줄 수 있는 것들이다. 궁극적으로 가장 비극적인 것이란 <아무 상관도 없다>라고 하는 태도이다. 부정적 의미에서 궁극적인 비극적 상황은 무감동, 외고집, 그리고 진정으로 비극적인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굳어버린 <냉담>이다.
나는 또한 그에 대한 반박으로 다음과 같이, 즉 <우리들이 인용하고 있는 이 작품들은 우리 시대에 있어서 사랑과 의지에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라고 묻고자 한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매우 생생하게 묘사된 행동의 모순을 보자 디디는 “자 가자”하고 말하지만 희곡의 지문에는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다. 현대인의 의지에 대한 문제와 의미 있는 행동을 할 수 없는 그의 무능력을 그 이상 더 실감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고도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 기다림에는 <기대>가 있고 기다림 자체는 희망과 믿음을 함축한다. 그들은 함께 기다린다. 또는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서 결혼한 부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격렬한 싸움을 하면서 미친 듯이 사랑을 거부해 버리는 경우를 보자. 그들이 지닌 사랑과 자애가 무엇이건 그것과 화해될 수 없는 무능력을 이렇게 제시하는 것은 사랑에 있어서 현대인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어떤 연구보다도 더 생생하고 설득력 있게 보여 주고 있다.


1.4. 비극적인 것과 분리

사랑의 비극적인 면에는 또 다른 원천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남성과 여성으로 태어나서 영원히 서로를 동경하게 되고 운명적으로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완성을 목 타게 갈망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환희와 실망, 황홀과 절망의 또 다른 원천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서 <존재론>이라는 어려운 개념을 소개할 필요를 느낀다. 그 용어는 말 뜻 그대로 <존재에 관한 학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의는 특히 존재론적인 사고에 익숙해 있지 않은 19세기 이후의 미국인들에게는 별로 도움이 못 된다. 나는 볼 틸리히가 철학을 배우던 학생 시절에 “왜 있는 것(something)은 있고, 없는 것(nothing)은 없는가?"라는 질문에 받았던 자신의 충격을 학생들에게 설명한 일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이런 질문은 사람들을 존재론적 수준으로 올려놓는 질문이다. 왜 섹스와 같은 것이 있는가? 그리고 왜 섹스가 아닌 것이 없는가? 왜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짚신벌레나 지렁이가 하듯이 자신의 일부를 떼어냄으로써 번식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진화>라는 말로, 즉 그것이 단지 그렇게 발전되어 왔다는 식의 답변으로 간단히 처리해 버릴 수가 없다. 그와 같이 우리는 또한 <신성한 목적>, 즉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에는 어떤 목적론적 <이유>가 있다는 식의 손쉬운 답변도 늘어 놓을 수 없다. 이 두 답변은 비록 정반대의 방향에서이긴 하지만 다 같이 논점을 회피하고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가까이 있는 사물들 ― 이 경우에는 섹스 ― 의 존재를 검사하여 신뢰할만한 답변을 찾아야 한다. “만일 성교가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적인 행위이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어떻게 해서 이십 년 동안 소년과 소녀들이 다같이 머리를 기르고 있는가라는 식의 물음을 기초로 해서는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존재론은 실존의 기본 구조를, 모든 순간에 주어진 구조를 탐구하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볼 때, 수컷과 암컷의 존재는 모든 실재의 근본적인 양극성(兩極性)에 대한 한 표현이다. 가장 작은 분자의 입자까지도 그들 사이에 긴장이 상존(常存)하고, 그 때문에 움직일 수 있다는 음전기와 양전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역동적인 운동력을 갖게 된다. 이러한 물질과 에너지의 분자구성으로부터 유추하여 화이트헤드와 폴 틸리히는 모두 실재하는 것이 음 ― 양의 양극성이라는 존재론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화이트헤드와 그의 저술을 중요하게 여긴 당대의 많은 사상가들은 실재를 고정된 상태로 있는 실체(substance)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양극성 사이에 상존하는 역동적인 운동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화이트헤드는 하나의 <과정> 철학(process philosophy)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실제로, 모든 실재가 동시에 하나의 수컷과 암컷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이론이 주장될 가능성은 충분하였는데, 헤겔의 정립(these), 반정립(antithese), 통합(synthese)의 이론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폴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즉 “헤겔의 연구가들은 초기의 그의 단편에서 헤겔이 사랑의 철학자로서 철학적 사색을 시작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헤겔의 변증법적 도식이 분리와 재결합이라는 사랑의 본질에 대한 구체적 직관으로부터의 추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성교를 할 때, 우리는 이러한 양극성의 리듬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친밀하게 체험한다. 성행위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가장 강력한 <관계 지음>의 법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접근, 삽입, 완전한 결합, 그러고 나서 부분적인 분리(비록 연인들은 이런 사실을 믿지 않고 서로 상대를 연모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지만), 그리고 다시 완전한 재결합으로 엮어지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행위를 함에 있어서 그렇게 친밀과 철수, 결합과 간격, 자신의 분리와 다시 완전한 결합에서의 자신의 투여 등의 성찬식을 행하는 것은 자연의 우발적인 사건이 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영원히 반복하면서 각기 이것들 즉, <접촉>과 <철수>에 참여한다는 것은 서로 알기 시작할 때의 거북스러운 관계에서도 한결같이 나타나고, 남자와 여자는 물론 새와 짐승에 있어서도 구애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원적인 존재(dual being)로 합일하고 그 이후 자율적인 개체로 분리되는 리듬에는 성교의 경우에 충분히 보았듯이 인간 존재 자체의 두 가지 극이 포함되어 있다.
섹스가 자기 자신의 다른 반쪽과의 재결합이라는 것에 관해 서로 다른 여러 문화권에서 자생한 여러 종류의 다른 신화들이 있는 것 같다.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한 <남녀 양성구유>(男女兩性具有)의 신화이다. 그러나 이 신화에 대응되는 중요한 편이 우파니샤드에 나타나 있다. 우파니샤드에는 인간의 창조와 관련하여 “그러나 인간은 어떠한 기쁨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므로 외로운 인간은 어떠한 기쁨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곧이어 그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 아내가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양극성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 구태여 신화를 들쳐볼 필요는 없다. 나는 언젠가 아토스 산에서 일주일을 보낸 적이 있다. 그곳은 에게해(海) 쪽으로 12마일 정도 뻗어 있는 북 그리스에 위치한 작은 고장으로 15칸 또는 20칸 정도의 수도원에 살고 있는 수도승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했다. 추측컨대, 12세기 이래로 여자들은 모두 배를 타고 아토스를 떠난 것 같았다. 그러나 수도승들은 여자들의 몸짓, 말투, 걸음걸이 등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마을길을 따라서 나로부터 멀어져 가는 한 수도승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그곳에 <여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것은 성격이 매우 다른 또 다른 남성 집단, 예컨대 외인부대의 경우에도 동일하였는데 그 부대의 병사들은 지중해에 있는 프랑스 선박의 갑판 위에서 자기네들끼리 춤을 추었다. 동성연애의 사건이 여기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또한 위의 현상을 도무지 설명하지도 못한다. 나는 오히려 여자가 없으면 남자처럼 행동하는 것이 강조되지 않고, 남자가 없으면 여자처럼 행동하는 것이 강조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말하면 주위에 여자가 있으면 더욱 더 남성다워지고 남자가 있으면 더욱 더 여성다워진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 두 성(남성과 여성)은 서로 반대의 성의 성격을 강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군대, 수도원, 또는 남성 사교 클럽에서처럼 한 무리의 남자들만 모아놓았을 때 그들로 하여금 가까이 손에 잡히는 일에 쉽게 몰두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공통적인 체험이다. 그러나 다른 영역에서 그들은 이상하게도 활기가 결여되어 있다. 우리는 그들이 죽어가고 있는 듯 무력하고 어떠한 반응도 나타내지 않으면서 권위주의적인 일처리에도 반항의 기미 없이 순순히 따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처럼 여자를 들여보내면 의식이 날카로워지고 도덕의식이 발달하게 되며 반항적 기미까지도 싹트기 시작한다. 참다운 의미에서 남성과 여성은 서로에게 불을 당겨주고 활력과 힘을 그리고 훌륭한 착상마저도 제공해 준다.
두 성(남성과 여성)이 있다는 사실은 번식에 많은 다양성을 주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양극성, 즉 유전인자의 혼합과 배합은 다양성을 무한히 증대시키고, 이에 원종(原種)과 새로운 배합종이 출현한다. 동일한 유기 조직체로부터 갈라져 나감으로써 생식하는 것은 짚신벌레처럼 자연의 가장 하등한 형태이다.(버나드 쇼는 인류에게 던진 신랄한 경고 가운데서 만일 인간들이 계속해서 무엇보다도 능률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면 이것이 인류가 처하게 될 운명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미국에서 다른 지역보다 사람들이 키가 크게 자라는 지역을 연구했을 때,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 지역으로 이주해 온 새로운 그룹의 사람들이 그 이전에 먼저 정착한 혈통이 다른 사람들과 결혼하여 서로 뒤섞였기 때문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근친결혼이 <생물학적으로> 유해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사회에서는 남매나 같은 가문에 속한 사람들 사이의 결혼이 사회적 불모화 즉 종족의 발전을 가로막는 혈통의 미분화(未分化) 때문에 금지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남성과 여성의 근육 조직이 서로 다르므로 우리는 이러한 율동적 과정에 적응하도록 되어 있다고 네덜란드의 심리학자 부텐디크는 결론짓고 있다. 그는 뼈와 근육 조직을 들어 본질적으로 남자는 직각에 가까울 만큼 직선적으로 조직되어 있어 공격하고, 치고, 찌르고, 그 외 단정적인 남성적 활동을 하기에 좋도록 되어 있으나 여자는 곡선적이며 둥글게 조직되어 있어 스스로를 개방하고, 자손을 낳고, 양육하며 특히 여성적인 즐거움을 주고받기에 적합하도록 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남근의 공격적인 메커니즘은 이미 어린 사내아이에게 나타나는데 사내아이들은 성기로 무엇인가를 찌르려는 동작을 취한다. 어린 계집아이는 그와 반대로 강압이나 정면 공격이 아닌 완곡한 접근으로 모든 것을 보존하고 알리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우리 사회는 남성적인 덕목으로 능동성을, 여성적인 덕목으로 수동성을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느 정도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큼 잘못된 것이다. 일반화시킨다는 것은 의례 오류를 지니기 마련이지만, 남자는 전쟁 기술을, 여자는 평화 기술을 지향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현실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은 모두 그들 나름대로 능동적이며 동시에 수동적인 양면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성들이 우리 사회에서 조잡하고 부당하게 과장되어 왔다는 사실이 실제적인 차이점을 망각하게 하는 이유는 못 된다. 19세기에서는 남자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자연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모든 여자까지도 정복할 때, 그러한 것이 소위 남성적인 덕목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부드러움과 달콤한 미소, 그리고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으며 불경스런 언사를 참지 못하고 아주 사소한 실수에도 쉽게 까무러치는 것이 상투적인 여성의 덕목이었다. 그에 대한 반발로 이러한 부분들을 없애버리려는 운동이 일어나 사람들은 더 이상 남자와 여자의 실질적인 구분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사람은 똑같이 느낀다.”라고 외쳐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은 동일한 것에 대해서는 동일한 방법으로 대처하게 되었다. 고러나 우리는 소름끼치게도 여성과 남성의 차이점에 대한 부당한 은폐와 함께 즐거움을 주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점들을 내팽개쳐 버렸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인류평등주의 운동에서 우리는 헬레나 도이치 박사가 지적한 사실, 즉 여성은 계시적인 오르가즘을 경험했을 때보다도 질이 <오무리는> 반응을 보였을 때 더 큰 쾌락을 느낀다는 점을 간과하였기 때문이다. 언어는 이 차이점들을 잘 보여 준다. 영어에는 오무리는 반응에 해당하는 <질 속으로 집어넣다>라는 단어가 있으나, 남성에게는 그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가장 대등한 것은 <음경>이란 말의 여러 형태들인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공격적인, 단정적인, 그리고 정복적인 행동을 지시하며 적의를 함축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남성들은 그 단정적인 반응뿐만 아니라 그것이 오므려지는 것에 대한 반응도 경험한다. 그리하여 여자의 오르가즘이 복합적이고 확산되는 것인 반면에, 남성의 오르가즘은 방해받고, 흥분 상태가 어떤 점을 지나면 억제할 수 없게 되는 확고한 신경학적 그리고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다.
성에 있어서 우리가 고찰해야 할 마지막 존재론적 사실은 간단하고 기본적인 것이다. 그것은 성교가 생식력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새로운 존재, 즉 어린아이를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남성이 그녀의 곁에 머물러 있건 떠나 있건 간에 적어도 아홉 달 동안 여성의 육체와 생활에서 의미심장한 변화를 가져오며, 그리고 병적인 경우를 재외하고는 그것보다 훨씬 오랜 기간 동안 여성에게 근본적인 영향을 끼친다.
아비시니아의 한 귀족 부인은 그러한 상태를 소박한 말로 이렇게 훌륭하게 표현했다.

‥‥‥여자는 첫사랑을 즐기는 바로 그 날 두 부분으로 절단된다.‥‥‥‥ 남자는 첫사랑 후에도 그 이전과 마찬가지이다. 첫사랑의 바로 그날부터 여자는 다른 사람이 된다. 그것은 전 생애를 통하여 그렇게 지속된다. 납자는 여자 곁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고 떠나가 버린다. 그의 생활과 몸은 언제나 같다. 여자는 임신을 한다. 어머니로서 그녀는 아이가 없는 여자와는 다른 사람이다. 그녀는 그날 밤의 결실을 아홉 달 동안 몸속에 간직한다. 무엇인가 자라나고 있다. 무엇인가가 그것을 결코 다시는 떠날 수 없는 그녀의 삶으로 변화시켜가 있다. 그녀는 자기의 아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어머니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꼭 한번 자기 가슴에 그 아이를 안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그녀의 마음에서 다시는 떠나지 않는다. 아이가 죽었을 때도 여전히 그렇다. 이 모든 것을 남자는 알지 못한다.‥‥‥ 그는 사랑 전과 사랑 후의 어머니가 되기 전과 어머니 된 후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오직 여자만이 그것을 알 수 있고,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언제나 처녀이어야 하며, 언제나 어머니이어야 한다. 사랑하기 전에 그녀는 처녀이고 사랑한 후에 그녀는 어머니이다.‥‥‥

카렌 호니의 주장에 의하면, 여자들은 아이를 낳을 수 있고 남자들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남자들은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문화 활동과 문화 창달을 통하여 <그들의> 창조성을 입증하기 위해 열심히 분투노력한다. 정신분석에서는 흔히 질투심이 개인적인 굴욕감과 절망감을 갖은 사람에게서 폭발한다. 남미에서 온 한 환자는 자기 어머니가 자기를 낳고 자기는 어머니의 젖을 빨아야만 했다는 이유로 자기 어머니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침대에 누워 몇 번씩이나 소리를 질렀다. 그는 모든 남자들이 그들 자신 속에 그와 같이 분노로 분출되는 시기심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이런 갈등의 원형적인 뿌리는 현대 또는 우리 <서구>의 문제보다도 훨씬 깊게 인간의 역사와 존재 자체에 뿌리박고 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 반대되는 면이 대두되고 있다. 나는 앞 장에서 “새로운 교양인들은 자신의 생식능력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 다른 인간을 창조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관한 깊은 반대감정병존(ambivalence)의 현상으로부터 불안이 일어난다는 의미에서이다. 내 환자 가운데 어떤 이는 그 자신과 그의 아내가 모두 의식적으로 아이를 가지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매달 아내의 배란기 때마다 성불능을 겪었다. 그는 아내의 애정을 받는데 자신의 경쟁자가 될지도 모를 아이의 아버지가 되기보다는 그녀의 남편으로 그리고 그녀의 아이로 머물러 있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반대감정병존의 현상은 프로이트의 <거세>, 즉 모든 불안이 파생된다고 믿는 원초적인 공포 속에도 있다. 왜냐하면 거세는 프로이트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남성의 신체 일부분의 단절>(이에 해당하는 용어는 절단(mutilation)이다)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거세는 고환을 제거하여 내시가 됨을 지칭하는데, 그것은 생식 능력의 상실로 이루어져 있다.
술탄(sultan,회교국 군주)의 궁전에서 거주하던 내시들은 발기가 되어 성관계를 가질 수 있었으나 아이의 아버지는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후궁들의 못된 행실에도 불구하고 혈통은 깨끗하게 지켜졌다. 내 생각으로는 이점에서 프로이트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 현명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산아 제한에도 불구하고 생식 능력에 대한 이러한 불안은 진실로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1.5. 피임약과 비극적 요소

수년 전 내게 상담하러 놨다가 잠시 동안 치료를 받았던 한 30세의 젊은 부인의 예를 들어 보자. 부유한 계층이 사는 환경 좋은 교외에서 자라나 뉴잉글랜드의 명문 여자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지성적이고 매력적이었으며 모든 면에서 전형적으로 훌륭한 여자였다. 대학에서 그녀는 40년대 중반 그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던 동질성과 가족에 대한 믿음에 동화되어 대학을 졸업할 때 결혼을 하여 즉시 대가족을 형성하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다. 그녀는 이웃 대학을 졸업한 남자친구와 졸업식 날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계획에 놀라우리만큼 충실하였다. 그러고 나서 처음 계획한 대로 2년에 한 명꼴로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30세가 되어서 나를 찾아왔을 때, 그녀는 자동차 수리공과 <사랑에 빠져>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그를 통하여 강렬한 정열을 체험하였다고 털어놓았다. 그녀는 그간 자기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경멸해왔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노라고 말했다. 친구들의 권유로 정신요법을 받아 볼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그녀는 교외에 있는 친정 부모와 살려고 다섯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떠나버렸다. 한때는 그렇게도 화려했던 계획이었건만 그것에 비하면 기이하고도 병적인 종말이었다.
그녀가 자동차 수리공과의 사랑을 <신성한 것>으로 느끼면서도 그 사랑 속으로 빠져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와 나는 많은 치료의 효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몇 년 후 내가 우연히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일하는 초라한 중년 부인의 모습이었다. 교외의 중상류 계급의 딸은 사생아가 딸린 <타락한 여자>의 옛 모형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거의 해결될 수 없는 상황으로 자신을 내팽개쳐 버렸던 것이다. 그 이유가 정보의 결핍 또는 계획성과 책임감의 결핍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다섯 명의 아이가 딸린 그 환자는 한때 현대적이고 지성적인 여인이었지만, 많은 점에서 여성해방과 피임약이 발명되기 이전의 빅토리아 시대의 여인들처럼 함정에 빠졌던 것이다.
나는 단순히 가족계획을 함으로써 비극적인 것들이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을 예증하려고 이 경우를 인용하고 있다. 피임의 심리학적 의미는 개인적인 책임의 영역을 확대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 관계가 용이하기는커녕 더욱 많은 짐을 가져올지도 모르며, 따라서 더욱 힘들지도 모른다.
피임이 어떤 성행위에서는 임신의 불안을 덜어주기 때문에 우리의 문화에서는 그것이 성적인 사랑의 비극적인 면을 단번에 없애주는 상징으로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나는 분명히 피임약과 출산 계획을 찬성하고 있지만 구태여 이 점을 명백히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산아제한에 관해 거의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원칙 때문에 피임이 현재의 성문제에 커다란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지금 말하고 있는 기본적인 문제에는 조금도 변화를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들은 피임으로 당연한 임신의 생물학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긴 했지만 그로 인하여 심리학적 반대감정병존의 현상이 증대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섹스와 사랑의 비극적인 면은 피임법에 있다고 하는데, 과거에 항상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기계적, 생물학적 영역이 아닌 심리적 영역에 속해있다. 그곳은 아무튼 비극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비극적인 면을 가져다주는 것은 죽음과 출산 같은 삶 자체의 생물학적 사실들이 아니라, 바로 인간으로서 우리들이 운명적으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이 필연들과 어떻게 <관계하느냐> 하는 점이다. 비극적인 것은 언제나 심리적, 정신적인 문제이다.
아이를 가질 수도 있고 갖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의 자유로부터 또한 개인적인 책임의 딜레마가 있다. 지난 40년 동안 산아제한이 가능했다. 비록 그 힘을 빌리긴 했으나 우리는 그것에 대한 심리적, 개인적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맹랑하기마저 한 그 문제의 회피는 전체 사회로서의 우리가 아이들에게 대해 느끼는 죄책감에서 나타난다. 우리들은 항상 주기만 하는 부모들에게 반항하거나 무언가를 알아차릴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으려고 애들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하고, 애들의 성장을 도우며, 애들의 비위도 맞추면서 그것을 모든 도덕적인 문제에 관해서 (지금은 마리화나에 관해서) 애들에게 베푸는 관대한 아량과 미덕의 징표로 여기는 부모들이다. 아이들이 밖에 나갈 때 우리는 “잘 지내라.”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아이들이 잘 지내지 못할까봐 염려하게 되고 또 <너무나>잘 지낼까봐 염려하게 된다. 그리고 줄곧 그들과 그들의 젊음을 남몰래 부러워하면서 젊은 시절을 어렵게 보낸 자신들과 비교하여 젊음을 즐겁게 보내는 그들에 대해 분개한다. 우리가 우리 애들을 마치 작은 왕처럼 떠받들고 있다는 사실을 하늘만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대기하고 있는 하인이며, 운전사이며, 요리사이며, 간호원이며, 밑 빠진 돈주머니이며, 가정교사이며 캠프의 안내인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아이들이 들고 일어나서 “제발, 우리 좀 <내버려> 두세요!” 라고 외쳐대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 외침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점차로 스며드는 어떤 죄책감으로 그 아이들을 내버려 둘 수 없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가장 큰 위협인 것이다.
우리가 속죄하고 있는 죄책감은 그 아이들을 키우면서 우리가 하였거나 하지 않았던 어떤 특정한 일에 대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우선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가졌다는 기본적인 사실에 대해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아이들을 가져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우리가 아이를 가져 버렸기 때문이다. 누가 이 무서운 사실의 의미를 이해하려고나 했던가?
또는 인구 제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부부들이 많이 생기겠지만, 오직 아이 하나만을 낳겠다고 계획하는 부부를 상상해 보자. 그 불쌍한 어린아이가 짊어져야 할 그 무서운 정신적 부담을 생각해 보라, 우리가 요법과정에서, 특히 한 아이만을 둔 전문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어린아이를 지나치게 보호하려는 경향이 많다. 아이가 부르면 부모들은 달려온다. 아이가 훌쩍거리면 그들은 어쩔 줄을 모른다. 아이가 아프면 그들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아이가 잠을 자지 못하면 부모들은 흡사 신경쇠약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어린아이는 태어난 환경 때문에 작은 독재자가 된다. 환경이 아니라면 그 아이는 원한다고 해도 그 밖의 어떤 것도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언제나 뒤얽혀 있는 모순된 사실이 있다. 즉 이러한 모든 관심이 실제로는 아이의 자유를 상당히 <박탈하는> 행위이며, 마치 왕가에서 태어난 왕자처럼 아이들이 결코 짊어지지 않아도 될 짐을 져야만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코멘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