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프로이트와 에로스

모든 사회와 거의 모든 개인들이 배우게 되는 것과 같이 고대 그리스인들은 삶과의 맞부딪침에 있어 총체적 인간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쉽사리 견지할 수 없는 집중과 숙련된 의식의 개방이 요구됨을 알고 있었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에로스를 건조화 시키려는 경향, 즉 단순한 섹스의 만족, 또는 육욕으로 환원시키려는 경향이 발생한다. 오늘날 에로스를 부인하려 하는 여러 집단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데니 드 루쥐망과 같이 에로스에 대해 의심스러워하고 거부하는 태도의 일부로서 에로스와 성적인 열정을 동일시하려는 이상주의자들도 있다. 왜냐하면 에로스는 항상 어떠한 순수한 정신적 또는 종교적 범주에서도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기 때문이다.
초기의 프로이트와 같은 자연주의자들도 있다. 그는 사랑을 자기가 열중하고 있었던 물리학에 있어 19세기의 헬름홀쯔(Helmholtz)식 모델에 맞춰진 양(量)적 개념인 리비도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맹렬히 투쟁했다. 그의 에로스는 부인하려는 욕구가 그 정도로 대단했었기 때문에 그의 <일반 정신 분석학 개론>의 찾아보기에는 에로스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는다. 어네스트 존스의 <프로이트의 일생과 업적>의 1,2권에서는, 그 2권에서만도 리비도에 대해서는 대략 서른 번이나 논의했던 데 반해, 에로스라는 말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제 3권에서 존스는 “프로이트의 책에서는 에로스에 대한 암시가 그의 초기 저술 <쾌락의 원리를 넘어서>에서 불과 몇 번 있었을 뿐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존스는 두 개의 사례를 들고 있는데 그 사례들이란 것도 사소한 것이며 <에로틱>이란 말을 단순히 <섹슈얼>이란 말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프로이트가 에로스를 올바로 이해한 것은 그의 마지막 저술에서 뿐이었다. 여기서 그는 에로스가 리비도와 구별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리비도와 대립되는 중요한 인간 경험이라는 관점에서 보았다. 이로부터 주목할 만한 사건이 일어난다. 즉 <프로이트는 완전히 충족된 리비도는 죽음의 본능을 통해 자아 파멸로 나아간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때 생의 정령인 에로스가 자가당착에 빠져 죽어가는 리비도를 구하려고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야기를 너무 앞질러 버린 것 같다.
먼저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해 프로이트를 논할 때 세 가지 면을 구별해야만 한다. 첫째는 그의 대중적인 영향력인데 실로 그것은 대단한 것이다. 그의 대중적 의미에서의 <충동>과 <리비도>라는 개념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질 때 대중적 의미에서의 프로이트주의는 (그것이 프로이트 자신의 참 의도에 엄청나게 반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직접적으로 섹스와 사랑을 진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프로이트는 섹스의 개념을 애완과 애호로부터 창조력과 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살찌우고 확대하려 애썼다. 프로이트는 “우리는 섹슈얼리티를 독일의 <리벤>(사랑하다:lieben)과 동일한 함축적 의미로 사용한다.”고 말한다. 섹스란 용어의 이 같은 광범위한 확대는 빅토리아 시대의 비엔나 문화와 연관되어 있다. 당시에 섹스가 그러했듯이 어느 중요한 인간 기능이 억압되는 경우 여타의 모든 인간 행동도 그 억압된 기능과 동일한 것으로 채색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성본능, 충동, 리비도라는 용어에 대한 프로이트 자신의 용법이다. 지성이 풍부한 다른 모든 사상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프로이트에게서, 이 용어들을 그의 사상의 발전 단계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야기된 뜻의 불명료성을 발견한다. 그의 리비도, 성적 충동이란 개념은 우리가 아래에 지적하는 바와 같이 섹스에 대한 생리학적 정의를 초월하는 다이몬적인 것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의 연구 초기에 친구들은 섹스 대신 <에로스>란 용어를 사용하도록 권했다. 이 용어가 보다 품위 있고 섹스란 용어가 야기하는 욕지거리들을 피하게 해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끈질기게(그의 관점에서 본다면, 정당하게) 에로스란 용어를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자신을 편하게 만들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이 당시 그는 에로스가 섹스와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고 믿었던 듯싶다. 여기서 그는 모든 개인 속에 있는 일정한 경제적 양(量)으로 구성된, 그리고 성적 합일 이외의 어떠한 종류의 사랑도 <목적이 억압된> 성욕의 표현으로 만드는 성적 사랑(리비도)의 모델을 주장했다.
우리는 다만 주어진 양만큼의 사랑만을 가지고 있다는 프로이트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스스로를 위한 사랑을 고갈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게 했다.

우리는‥‥‥<자아 리비도>와 <대상 리비도>가 거꾸로 정립된 관계임을 본다. 한쪽이 사용되면 될 수록 다른 쪽은 그만큼 더 고갈된다. <대상 리비도>의 가능한 최고의 발전 국면은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보이는 바, 이때 주체는 객체에의 집중을 위하여 자기의 특성을 포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사랑에 빠짐으로써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비슷한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나 자신의 임상 경험의 기초에서 나는 이것을 섹스의 수력학적(水力學的, hydraulic) 모델로 표현하는 것은 여기에 걸려 있는 비판적 가치들을 파괴하는 짓이라고 믿는다. 사랑에 빠짐으로써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새로운 경험의 땅으로 던져진 데 대한 현기증과 충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때 세계는 갑자기 넓혀지게 되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결코 그것이 존재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들과 부딪치게 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주면서도 우리가 지닌 자율중추(自律中樞)를 여전히 보존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이러한 경험이 우리를 겁나게 한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땅의 넓음과 위험에 대한 불안(보통 즐거움과 불안이 동시적으로 야기된다)을 자존심의 상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의 정상적인 일상적 관찰은 프로이트의 견해와 정반대되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에 빠질 때 나는 보다 많은 가치를 느끼며 스스로를 보다 소중하게 취급한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여 머뭇거리는 젊은이가 일단 사랑에 빠질 경우 마치 “당신들은 지금 <대단한 사랑>을 보고 있는 거요”라고 말하는 듯한 내적 자신감과 확신에 찬 걸음걸이로 걷는 것을 보아 왔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현상을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리비도 집중이 되돌아 온 것>에 연연하는 것으로 뭉뚱그릴 수가 없다. 사랑에 빠짐으로써 얻어지는 이 내적 가치감은 본질적으로 상대방에게 준 나의 사랑이 되돌아 왔느냐 안 왔느냐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는 일반화된 이러한 이론은 H.S 셜리반에 의해 가장 잘 정립되었는데 그는 우리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만큼 남을 사랑하며 만약 스스로를 존중할 수 없다면 남을 존중하거나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에 관한 많은 증거를 제시했다.
이제 프로이트가 그의 생애와 연구의 3분의 2에 이르는 동안 에로스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우리 시대의 <섹스의 자유로운 표현>이라는 복음에 동의했었으리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가 루소가 남태평양의 섬에 사는 행복스러운 원주민들을 이상으로 설정했던 것과 같은 우리 사회의 <자연 그대로의 행동>에 관한 모든 얘기들을 생전에 들을 수 있었다면 눈을 흘겨댔을 것이다. 1912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성적 욕구의 심리적 가치가 그 욕구에 대한 충족이 쉬워질수록 감소된다는 점은 쉽사리 입증될 수 있다. 리비도를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장애가 있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만족에 대한 자연적 저항이 충분하지 못한 경우에는 사랑을 즐길 수 있기 위하여 인습적 저항을 설정해 왔다. 이것은 개인과 국가 모두에게 진실이다. 고대 문명의 몰락기와 같이 성적 만족에 아무런 장애가 없던 시기에 있어서 사랑은 가치가 없어지고 삶은 공허해지며 없어서는 안 될 애정적 가치들을 되찾기 위해서는 강한 대응 구조가 요구되었다‥‥‥기독교의 금욕주의적 조류는 이교도의 풍습이 결코 줄 수 없었던 사랑의 심리적 가치를 창조해 냈다.

프로이트는 위의 구절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두해 전에 썼다. 그가 이 문제의 개인에 대한 영향을 깨달은 것은 전쟁 직후였다. 전쟁 노이로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환자들이 쾌락 원리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되자 그는 어떤 근본적인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외상(外傷 trauma)을 제거하려 하지 않고 그와는 정반대로 행동하여 실제 생활과 꿈속에서 그 고통스러운 외상을 되새기곤 했던 것이다. 그들은 기억에 남겨진 외상에 대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애썼다. 즉 무엇인가가 진정될 수 있도록 그 불안을 재 경험하거나 그들의 세계와 관련하여 그 외상이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재형성시키려고 바동거렸다. 이것을 아무리 묘사한다 하더라도 단순한 긴장의 감소와 쾌락의 증가보다 훨씬 복잡한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현상은 프로이트를 매조히즘(masochism: 피학성 음란증)과 더불어 강박 충동이라는 임상적 문제들로 이끌어 갔다. 그는 사랑이 자기의 이전의 이론들에 내포된 것보다 더 복잡한 것이며, 항상 증오와 양극을 이루며 뒤섞여 있다는 것을 보았다. 이것으로부터 생은 항상 죽음과 양극을 이루며 존재한다는 그의 이론 정립까지는 먼 거리가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그의 중기와 후기의 저술에 나타나는 우리들의 목적상 가장 재미있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섹스와 에로스에 대한 프로이트의 관점 가운데 세 번째 것에 이르렀다. 그는 성적 충동 자체의 만족 ― 긴장의 감소를 수반하는 리비도의 완전한 충족 ― 은 궁극적으로 자기 패배적 성격과 죽음 지향적 경향을 갖고 있다고 보기 시작했다.
전쟁 직후인 이 시기, 즉 그가 64세였을 때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운동 자체의 내부에서조차 아직까지도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쾌락의 원리를 넘어서>를 썼다. 그는 “자동적으로 쾌락의 원리에 의해 조절되는 정신적 사건들의 추세는 내적으로는 불쾌한 긴장에 의해 움직이며 그 마지막 결과가 긴장의 저하와 일치하는 방향을 취한다.”는 그의 이전의 믿음을 개괄하면서 시작한다.(그가 변덕스럽게도 <교육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라고 언급한) 성적 본능은 긴장의 줄임을 통한 쾌락의 목표의 으뜸가는 보기였다. 프로이트는 본능이 원초적 상태로의 되돌림을 그 목표로서 갖고 있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그는 우주의 에너지는 끊임없이 아래로 흐르고 있다는 열역학의 제 2법칙을 빌린다. “‥‥‥본능은 유기체적 생명에 고유한 원초적 상태를 되찾으려는 충동이다.‥‥‥ 그리고 무생물이 생물 이전에 존재했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본능은 우리를 무생물적인 것에로 돌아가도록 촉구한다. 본능은 흥분의 완전한 부재인 열반을 향하여 나아간다. “모든 생명의 목적은 죽음이다.” 여기서 우리는 프로이트의 가장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이론인 죽음 본능의 이론에 다다르게 된다.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으로 보이는 우리의 본능은 이제 다만 우리를 죽음으로 돌아가도록 운명지어진 거대한 궤도 속으로 밀어 넣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렇게도 <고귀한 재능을 지닌> 인간이란 생물이 자기를 오직 돌과 같은 무생물적 상태로 되돌려 보내게끔 운명지어진 순례의 길을 한 걸음 두 걸음 걸어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먼지로부터 와서 궁극에는 먼지로 되돌아간다.
그때, 그것의 중요성을 나는 믿지 않았지만 프로이트의 제자들에 의해 인정되고 있는 주목할 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프로이트의 저술에서 최초로 에로스가 중심적이고 필요한 개념으로 등장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비엔나의 중학교에 다닐 때 그리스어로 일기를 썼던 이 사람이 최대의 딜레마에 다다라 이 문제에 맞서갈 길을 옛사람들의 지혜 속에서 찾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쨌든 <에로스가 섹스와 리비도를 소멸로부터 구하기 위해 등장한다.>
에로스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에 대한 정반대로서 나타난다. 에로스는 “통합하고 묶으며, 건설하고 융합하며, 우리 안에 있는 긴장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에로스는 <신선한 긴장감>을 끌어들인다고 프로이트는 쓰고 있다. 프로이트는 에로스를 리비도보다 클 뿐만 아니라 대단히 중요한 차이점을 지닌 것으로 특징졌다. 오든의 말대로 에로스는 <도시의 건설자>이며 긴장을 해소시켜 버리는 쾌락의 법칙과는 반대로 사람으로 하여금 문화를 창조할 수 있게 한다. “에로스는 삶의 시초부터 작용하며 <죽음 본능>에 반대되는 <삶의 본능>으로 나타난다.” 인간 존재는 이제 두 거인, 즉 에로스와 타나토스 사이의 전쟁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구성된다.
프로이트가 이 탄생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그의 생각 속에서의 모순의 진행을 어떻게 경험했는가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글에서 볼 수 있다. “‥‥‥죽음 본능은 본성적으로 벙어리이며‥‥‥생의 아우성은 대부분 에로스로부터 나아간다.” 이것은 오직 천재만이 가능한 대담한 모순이다. 가장 중요한 모순의 하나는 프로이트가 아직도 에로스와 성적 본능을 같은 것으로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에로스의 리비도>, <이드의 리비도>, <에고의 리비도>, <탈 섹스화된 리비도>, <탈 섹스화되지 않은 리비도>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독자들은 그가 자기의 모든 통찰을, 심지어는 에로스의 재발견이라는 위대한 통찰까지도 그의 옛 이론 체계에 짜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프로이트가 성적 본능이 쾌락의 원리에 따라 작용한다는 것이 자가 당착이라는 사실을 알고서야 비로소 에로스를 끌어들였다는 역학적인 점을 직시함으로써 이러한 혼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와 같이 에로스는 참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나타낸다. 프로이트는 자기의 한 논문을 “에로스는 이간질하는 자다”라는 애정 깊은 표현으로 맺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에로스가 쉽사리 죽음 본능으로 하여금, 쾌락의 원리에 의해 유발되며 무감동인 대가로 획득되는, 이드 속에 평화를 수립하게끔 하지는 않으리라는 인상을 받는다. “충족감이 승리할 때 에로스는 쫓겨나며 죽음 본능은 자유롭게 자기의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라고 그는 쓰고 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는 프로이트가 직면했던 문제와 비슷하다. 즉, 존재의 궁극적인 목표는 충동의 만족이라는 가정이 섹스를 지루함과 진부함의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었다는 점 말이다. 에로스는 우리의 전진하게 하는 가능성의 영역이며 인간의 상상력과 지향성이 미치는 범위이다. 몇몇 학자들은 죽음의 본능에 대해 논박하면서 열역학의 제 2법칙으로부터의 추론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식물과 동물은 그들의 환경으로부터 자기 쇄신의 힘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환경(사람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의 자연 세계)과의 끊임없는 대화에 참여하는 우리의 능력이다.
프로이트 자신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에로스 개념과 그의 개념이 서로 연관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가졌다. 그는 “‥‥‥우월감을 가지고 정신분석학을 경멸조로 내려다보는 사람들은 정신분석학에서의 확장된 성욕이라는 말이 하늘에 있는 플라톤의 에로스라는 말과 얼마나 가깝게 일치하는 개념인가를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프로이트의 추종자들이 그의 에로스와 플라톤의 에로스가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썼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열렬하게 그들의 견해를 확인했다. “철학자 플라톤의 에로스는 나하만존과 피스터가 상세히 보여준 바와 같이 그 기원과 기능 및 성적 사라오가의 연관에 있어서 정신분석학의 사랑의 힘, 즉 리비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에로스 개념은 플라톤의 에로스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더글러스 모건 교수가 플라톤적 사라오가 프로이트적 사랑에 대해 깊이 연구한 후에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와 같이 그 반대인 것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사랑이 플라톤의 사랑이 거꾸로 라는 것은 정말이다. 형이상학적 기반과 동적인 방향에 있어서 그것들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 서로 모순의 관계다. (프로이트가 생각한 것처럼) 그 두 해석이 같은 것인 한, 설사 어느 한쪽이 뜻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어느 것도 정말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필립 리프도 “정신분석학적 에로스는 플라톤의 에로스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프로이트가 플라톤과 공유하는 것은 사랑은 인간 경험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이라는 것, 또 사랑은 모든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사랑은 깊고 넓은 원동력이라는 것 등이다. “두 사람 모두의 <에로스>의 의미 속에는 생식기적 섹스적인 사랑, 우애롭고 시민적인 사랑, 과학과 예술과 재예(才藝)에 대한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제기할 대, 우리는 완전히 다른 답을 얻게 될 것이다. 에로스를 도입하고 난 후에조차도 프로이트는 에로스를 뒤에서 미는 것, “혼란하고 미분화되고 본능적인 에너지의 원천으로부터 성숙한 삶과 ― 부분적으로만 그리고 고통스럽게만 개화된 ― 사랑을 지향하여 예측할 수 있고 규정할 수 있는 통로를 따라” 나오는 힘으로 정의한다. 이와는 반대로 플라톤에게 있어서 에로스란 전적으로 앞에서 사람을 <이끄는> 가능성과 서로 얽힌 것이며 이것은 곧 합일에의 열망, 새로운 형태의 인간 경험과 관계를 맺는 능력인 것이다. 이것은 “총체적으로 목적 지향적인 것, 자연 이상의 것을 지향한 움직임”이다. 프로이트가 그 속에서 연구하고 사고하고 저술한 문화는 소외된 문화였고, 이 소외는 이미 사랑과 섹스에 대한 그의 정의 속에 드러나 있다.(반세기 후인 오늘날에는 더욱 많이 드러나고 있긴 하지만‥‥‥) 이것은 아마 그의 에로스가 플라톤의 에로스와 혼란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로서는 자기의 에로스가 플라톤의 에로스 내에 있는 어떤 것을 지니고 있으리라는 프로이트의 직관, 또는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는 모르지만) 희망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것은 우리가 프로이트에게서 자주 발견하는 점, 즉 (그의 빈번하고도 중요한 신화 사용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바) 그의 개념의 에로스와 의미가 자기의 방법론과 그 개념의 엄밀한 적용의 논리적 일관성을 벗어난다는 점의 또 하나의 보기인 것이다. 위의 모건 교수의 진술 가운데 프로이트적 사랑의 개념과 플라톤적 사랑의 개념은 다르다는 점에 대해서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얻은 임상적 실험에 기초하여 볼 때 위의 두 개념은 서로 상반되지 않으며, 두 개념 모두가 인간의 심리학적 발달에 있어 요구되는 반성을 제시하고 있다고 믿는다.


1.5. 에로스의 만남 : 사례 연구

나는 내가 이 장을 쓰고 있는 도중에 일어난 정신분석학적 경험을 하나의 예로서 제시하고자 한다. 나는 이것이 정신치료에 있어서의 에로스에 관한 프로이트적 관점과 플라톤적 관점간의 상반성분만 아니라 상호 연관성 또한 제시해 주고 있다고 믿는다.
심한 감정의 결핍과 자율성의 마비(이 두 가지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 사이의 성관계를 심각한 문제로 만들었다)및 때때로 그녀를 불능으로 만드는 자의식을 치료하고자 20대 후반의 한 부인이 나에게 왔었다. 그녀는 꽤 이름난 오랜 전통의 미국 귀족 가문의 딸로서 어머니는 자기 학대 증세가 있었고, 명망이 높은 아버지와 세 오빠가 만든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 이성적(理性的) 기질을 가진 그녀는 치료 중에 이러저러한 상황에서 자기가 왜 정서적으로 마비되었는지를, 그리고 그녀가 성적으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분노와 성적 열정과 다른 감정들을 상당히 자유롭게 경험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그녀의 어린 시절과 그녀가 지나치게 꽉 짜여진 가정 속에서 생성시킨 난해한 의상들에 대한 상당량의 유익한 탐구에 의해 도움 받았고, 그녀의 실제 생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어떤 단계에 이르자 우리는 교착 상태에 부딪혔다. 그녀는 “왜 그런가?”라는 추구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그녀에게 더 이상의 변화를 갖다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가 남편과의 참된 사랑의 가능성을 찾아 애쓸 때 그녀의 여러 감정들이 통일되게 행동되지 앉고 자기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동기에 따라 멋대로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야기에 따르면 전날 밤 초저녁에 남편에게 장난을 걸고 싶은 감정을 느꼈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남편더러 자기의 등속에 벌래 같은 것이 들어 있는 것 같으니 드레스를 들추고 집어내 버려 달라고 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밤이 이슥해졌을 무렵 그녀가 책상에서 수표를 쓰고 있는데 남편이 갑자기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방해를 받아 화가 난 그녀는 펜으로 남편의 얼굴에 줄을 그어버렸다. 이 얘기를 하면서 그녀는 자기의 분노가 어린 시절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어도 자기를 방해하고 부려먹은 오빠들의 행동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미리 준비한 해석을 제시했다. 그 사건에서 무엇을 <위해> 감정을 사용했느냐고 물음으로써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자 그녀는 화가 나서 발끈했다. 내가 그녀의 <자유로운 자율성>을 빼앗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자기의 본능을 믿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가? 우리는 그녀가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내가 그녀더러 감정으로 무엇을 하려 했느냐고 물은 것은 도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더욱이 그 질문은 그녀의 가족들이 그녀에게 책임을 물을 때처럼 들렸던 것이다. 그녀는 “감정은 감정이지요!”라고 웃음으로 비난을 끝냈다.
우리는 이제 그녀가 빠져 있는 모순을 볼 수 있다. 그녀는 결과적으로 자기 남편과의 그 밤을 여지없이 망가뜨렸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들 사이의 진정한 사랑의 가능성을 추구했지만 실제로는 그 정반대의 것을 실현했던 것이다. 그녀는 한손으로는 남편을 그녀 쪽으로 잡아끌고 다른 손으로는 재빨리 밀쳐버렸다. 그녀는 이런 모순된 행위를 오늘날 가장 평범한 가정, 즉 감정은 사람의 내부애서 밀고 올라오는 주관적인 것이며 정서(이 용어는 <밖으로 움직인다>는 e-movere로부터 파생된다.)는 사람에게 행동을 취하도록 하는 힘이며 어떤 식으로든 감정을 느끼는 순간 감정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가정으로 정당화한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정서에 대한 분석되지 않은 가정이다. 이것은 아드레날린의 내적 분비 작용과 분노 또는 생식선의 흥분을 방출시킬 욕구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성적 대상을 발견해야만 한다는 일종의 선수리학(腺水理學)으로부터 그 모델을 취하고 있다.(프로이트가 실제로 뜻하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의 이름은 이 가설에 후광을 부여해 주는 것이 되었다.) 이 가설은 우리들 대부분이 정신의학이나 생리학 강좌의 첫 코스에서 접하게 되는 몹시 궤변적인 결정론적 모델일 뿐만 아니라 널리 받아들여지는 육체의 기계적 모델이기도 하다.
아무도 그것을 실제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근본적으로 유아적이고 정신분열증적 조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를 우리와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를 연결하는 아무런 다리도 없이 단세포 동물처럼 서로 떨어지고 소외되게 한다. 우리는 지금부터 죽는 날가지 <정서적으로 감응>하고 성관계를 갖지만 남과 여하한 진정한 관계도 경험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대부분에게 적용되진 않는다 하더라도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식의 외로운 방법으로 정서를 경험한다는 점을 깨달아서 두려움을 감소시키지 못한다. 결국 느낀다는 것이 고통을 감소시켜주기는커녕 오히려 외로움을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그들은 느끼기를 멈추는 것이다.
나의 환자(그리고 우리 사회)의 관점에서 누락된 것은 정서가 뒤에서 밀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정서란 무엇인가를 형성하려는 추진력이며 특정 상황을 만들라는 메시지이라는 점을 잊고 있다. 감정은 한 순간의 우연한 상태만이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고 내가 무엇이고자 <바라는> 한 방식인 것이다. 가장 악화된 병상(病狀)을 제외하고 감정이란 인간의 차원에서 일어나며 인격체로서의 자기 자신의 체험이며 아무도 실제로 임재해 있지 않다 하더라도 나 이외의 사람들을 상상하는 것이다. 감정은 우리 세계의 뜻있는 사람들과 의사를 소통하는 정상적인 방법이고 그들과 관계를 조성하고 확립하는 일종의 언어이다. 다시 말해서 감정이란 <지향적>인 것이다.
<미는> 힘이라는 정서의 첫 번째 면은 과거와 관계가 있으며, 유아기와 그 이전의 경험을 포함한 과거의 인과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우리에게 그 영속적인 중요성을 가르쳐 준 정서의 <역행(逆行)적>인 면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환자의 어린 시절에 대한 조사와 재경험은 정신요법을 지속하는 데 있어서 건전하고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반면에 두 번째 면은 현재에서 출발하여 미래로 나아간다. 이는 정서의 <전진적>인 면이다. 화가의 그림물감과 붓처럼 우리의 감정은 우리 안에 있는 의미 있는 무엇을 세상에 전해 주고 나누어 주는 수단이다. 우리의 감정은 남을 고려할 뿐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임재해 있는> <감정에 의해> <형성되기도 한다>. 우리는 일종의 자장(磁場)속에서 <느낀다>.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은 흔히 그렇게 하려는 의식을 갖지 않은 채 (마치 바이올린의 현이 우리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의 무한히 작은 소리로 울릴지라도 한 방안에 있는 다른 악기들의 음류에 공명하는 것처럼)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알아차린다. 모든 성공적인 연인은 이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이것은 훌륭한 정신요법가에게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요소는 아니라 할지라도 매우 필요한 요소이다.
정서의 첫 번째 면을 다룰 때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모두 건전하고 정확한 방법이다. 그러나 두 번째 면은 “무슨 목적으로?” 라고 물어야만 할 것이다. 프로이트는 대체로 첫 번째 방법과 관계되어 있는데 그는 틀림없이 내가 여기서 사용한 <목적>이라는 말을 거부했을 것이다. 플라톤이나 고대 그리스인들의 에로스 개념은 정서란 유인력(誘引力) 즉 앞으로 끌어당김이라는 두 번째 면과 연관되어 있다. 나의 감정은 나를 사로잡는 미래의 목표, 이상, 가능성 등에 의해 일어난다는 측면 말이다. 이러한 구분은 현대 논리학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즉 <이유>(reason)는 당신이 왜 이런 일 또는 저런 일을 하는가를 설명해 주는 과거에 대한 고찰이며, <목적>이란 그와 반대로 당신이 그것을 행함으로써 무엇을 획득하고자 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 첫 번째 개념은 결정론과 상호 연관되어 있고 후자는 새로운 경험 가능성에의 열림을 가리키며 따라서 자유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들을 잉태할 능력 및 새로운 가능성들에 응답할 능력,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들을 상상으로부터 끌어내어 현실 속에서 시도한 능력을 통하여 미래의 형성에 참여한다.> 이것은 적극적인 사랑의 과정이다. 이것은 남과 자연계의 에로스에 응답하는 우리의 에로스다.
나의 환자에게로 돌아가 보자. 그녀는 위에서 말했듯이 절망감을 경험했고 그런 가운데서 희미하게나마 자기가 빠져 있는 올가미를 인식했다. 이 두 기간이 지나자 그녀는 “나는 항상 남편에 대해서 왜 그런 감정을 가지게 되는가 하는 이유를 찾았어요.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으니까요. 또 그 과정이 열반의 세계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었죠. 나는 이제 그러한 원인규명으로부터 벗어났어요. 아마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그녀가 깨달은 것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정신요법에서나 실생활에서 기본적인 욕구가 모두 충족되어 더 이상 욕구 충동적이지 않을 때 이유들이 그 타당성을 잃는다는 의미로서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갈등은 한편으로는 교착 상태와 권태가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고 의식을 깊게 하며 새로운 생활 방식을 고르고 참여하도록 한다.
<이유>와 <목적> 사이의 다른 점은 나의 환자와 강하게 부딪혀 그녀의 중대한 내적 통찰력들을 일깨워 주었다. 그녀에게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러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그녀가 책임에 대해 부여했던 뜻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제 그녀는 책임을 그녀의 가족으로부터의 단순한 외부적, 수동적 기대가 아니라(그날 밤 그녀가 남편에게 휘둘렀던 힘을 인식하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능동적인 책임으로 보게 되었다. 이제 책임은 그녀가 남편과 다른 경우의 생활에서 무엇을 원했느냐는 선택에 있는 것이었다.
병상(病狀)이 깊은 사람들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모든> 정서는 외적으로 아무리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자아를 구성하는 <형태> 안에서 어떤 종류의 일관성을 갖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임상적인 문제는 자기에게 적대적이고 파괴적인 부모에 대해 사랑스럽게 행동해야만 하도록 되어 있는 불안스러운 어린아이의 경우에서와 같이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로 하여금 자기가 무엇을 느끼는지 또는 자기의 감정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인식하게 할 수 없거나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환자가 그날 밤 자기 남편에게 했던 두 개의 상반되는 행동을 분석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두 가지 행동은 남편과 남자 전체에 대한 증오, 즉 그녀가 남자는 악한임을 입증하기 위해 설정한 상황에 의해 비롯된 것임이 밝혀졌다. 두 가지 행동 모두(그녀가 정신요법의 <해탈 과정>에서 나를 그렇게 대했듯이) 남자는 권위의 표상이라는 가정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 사이 그녀는 변덕스럽고 고집 센 어린 아이였다. 그녀는 어린 아이의 방식으로 남자들과 대항할 수 있었지만(다음 단계에서 불안으로 표출된 바와 같이) 어른으로서의 남자들과 대항해 낼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제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에로스의 날개, 즉 인과 관계라는 새로운 개념에 도달했다.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을 단지 <이유>에 대한 그리고 경직된 예측으로 흐르기 쉬운 설명에만 뿌리를 둔 당구공 식의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에로스의 동기는 과거의 결정론과 매우 다른 까닭에 인과 관계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고 믿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모든 것으로 하여금 최고의 형태, 즉 세계를 원인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의 목적으로서 움직이는 순수한 현존을 지향하도록 촉구하는 보편적인 <에로스>의 주장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가 묘사하는 운동은 잠재적인 것으로부터 현실적인 것으로, 잠재력으로부터 활동력으로 나아가는 운동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인간은 새로운 가능성과 목표와 이상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는 존재이며 이러한 가능성과 목표와 이상이 인간을 미래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라고 제안하고 싶다. 부분적으로 과거가 우리를 뒤에서 밀어대고 결정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가 아니라 이것을 다른 반쪽과 합일시키려는 까닭에서다. 에로스는 우리에게 <까닭>과 <목적>이 합일되어 있는 인과 관계를 부여해 준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자연계에 발을 딛고 있는 까닭에 앞의 것은 모든 인간 경험의 부분이다. 따라서 우리들 스스로는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그 상황에 대한 객관적 사실들을 가능한 한 많이 찾아낼 필요가 있다. 이 영역은 과거의 사건들이 인간의 행동에 강박적이고, 반복적이며, 족쇄와 같고, 예측 가능한 영향을 미치는 신경증적 문제에 있어 특히 타당하다. 프로이트가 고정적이고 결정론적인 인과율이 신경질환에 작용한다고 주장한 점은 옳았다.
그러나 그가 이것을 <모든> 인간 경험에 적용하려 한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개개인이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의식하고, 미래의 새롭고 상이한 가능성에 대해 자기를 개방하고, 개인적 책임과 자유의 요소로 도입할 때 목적이라는 측면이 그 과정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1.6. 병든 에로스

우리가 논의해 온 에로스는 그것이 아직도 창조적 원동력이며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다리였던 고전 시대의 것이다. 그러나 이 <건강한> 에로스는 타락했다. 에로스에 대한 플라톤의 이해는 에로스가 힘차고 원초적인 창조자라는 헤시오드의 에로스관과 에로스가 병든 어린애가 된 후세의 타락한 형태 사이의 중간적 형태였다. 에로스이 이 세 가지 측면은 인간 경험의 심리학적 원형(原型)들의 정확한 반영이다. 즉, 어느 시대건 우리들은 각각 에로스를 창조자로, 중재자로, 평범한 플레이보이로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는 결코 사랑의 진부화를 경험하고 열정이 없으면 사랑은 병든다는 것을 발견한 최초의 시대가 아니다.
이 장의 첫머리에 인용한 매력적인 얘기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이 인간 영혼의 원형에서 솟아나오는 통찰을 신화의 원형적 언어로 표현한 것을 보았다. 아레스와 아프로티테의 아들 에로스는 <얇고 가벼운 날개와 장난기 넘치고 보조개 팬 장밋빛 얼굴에 작고 살이 토실토실한 채 성장하지 않았다.> 그에 놀란 어머니는 <사랑은 정열이 없으면 자라나지 않는다.>는 교시를 받는다. 신화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여신은 이 대답에 감추어진 의미를 찾아내려고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그것은 정열의 신 안테로스가 태어났을 때야 비로소 드러났다. 날씬하고 잘 생긴 동생(안테로스)과 같이 있을 때 에로스는 성장하여 성숙하였다. 그러나 안테로스와 떨어지게 되자 에로스는 다시 장난을 좋아하는 어린아이로 되돌아 가버렸다.

그리스인들의 그들이 가장 심오한 지혜를 표현하고자 했던 이 천진난만한 문장 속에는 오늘의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지적이 숨겨져 있다. 그 하나는 에로스가 아프로디테의 아들인 동시에 아레스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사랑이 공격적인 성격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또 한 가지 의미는 헤시오드의 시대에 힘 있는 창조자로서 불모의 땅에서 푸르른 나무들이 솟아나게 하고 사람에게 생명의 정신을 불어 넣었던 에로스가 이제는 어린아이로 퇴행하여 장밋빛 얼굴에 살이 토실토실한 장난꾸러기로, 때로는 활과 화살을 가지고 노는 단순하고 살찐 아이로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고대의 회화에서와 마찬가지로 17,18세기의 회화에서도 에로스가 쇠잔한 큐피드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을 볼 수가 있다. <고대 예술에서 에로스는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젊은이로 표현되다가 차츰 어려져서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러서는 어린아이가 되고 말았다.> 알렉산더 격(格)의 시행(詩行)에서 에로스는 장난이 심한 어린아이로 퇴행되고 있다. 에로스가 이렇게 타락한 데에는 그 자체 내에 어떤 요인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모습은 그리스 문명이 해체되기 오래 전의 (헤시오드 판(版) 이후이긴 하지만) 신화에까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 시대에 있어서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가에 대한 핵심을 찔러 주고 있다. 즉, 에로스가 정열을 잃었고 활기가 없으며 어린 아이와 같고 진부한 것이 되어 버렸다는 점 말이다.
흔히 신화는 그리스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다 같이 진실인 인간 경험의 근원에 있어서의 모순, 즉 우리가 한때 힘찼고 존재의 근원이었던 에로스로부터 벗어나 장난기 있는 섹스로 이행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준다. 이제 에로스는 지위가 떨어져 부드러운 구름다리 위에서 인생을 끝없이 관능적인 것으로 자극하는 일을 맡은 예쁜 바텐더로서 포도주를 파는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 그는 섹스에서건 출산에 있어서건 힘의 창조적인 사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만족을 뜻하게 되었다.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지만 우리는 신화가 오늘날에 일어날 일, 즉 에로스가 섹스에 있어서도 흥미를 잃었다는 점을 정확히 예고했음을 발견한다. 어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는 에로스를 찾아 활과 화살로 사랑을 널리 퍼뜨리는 본연의 일을 깨우쳐 주려고 애쓰고 있다. 반면에 그는 십대의 건달이 되어 가니메데와 카드놀음을 하고 있다.
생명을 부여해 주는 화살의 정령은 가버렸다. 남자와 여자에게 생명의 혼을 불어 넣던 창조자는 사라졌다. 훌륭한 주신제(酒神祭)도 열광적인 춤도 가버렸다. 과장된 선전이 남발되는 현대 기계 문명의 시대에는 신비로움도 가버렸다. 목가적인 흥취마저도 가버렸다. 에로스는 이젠 정말 플레이보이인 것이다. 그는 펩시콜라에 취해 있다.
문화란 항상 에로스를 길들여 그 사회의 필요에 두드려 맞춤으로써 그 자체를 소멸시키는 짓이나 한단 말인가? 에로스를 새로운 존재와 이상과 정열을 탄생케 하는 힘으로부터 끌어내리고 새로운 존재를 만들기 위해 낡은 것들을 부숴버리는 그 창조적 힘이 소멸될 때까지 약화시키는 짓이나 한단 말인가? 에로스는 영원한 안락, 희롱거리, 유복함, 그리고 궁극적으로 무력감에 이르도록 하는 짓이나 한단 말인가?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옛날 세계에 있어서 에로스와 <기교> 사이의 <전쟁>이라는 새롭고도 특수한 문제와 부딪히게 되었다. <섹스>와 기교 사이에는 전쟁이 없다. 기술 과학적 발명들은 산아제한용 약품과 산아제한의 방법에 관한 책들이 잘 드러나 있듯이 섹스를 안전하고, 손쉽고, 능률적인 것으로 만든다. 섹스와 기교는 함께 연합하여 일상생활을 <조정>한다. 즉, 주말에 긴장을 완전히 방출시킴으로써 월요일에 빡빡한 세상사를 더욱 잘 행할 수 있게 해준다. 관능적 욕구와 그것의 충족은 (나중까지 그럴지 안 그럴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적어도 순간적 감정에 있어서는 기술적인 것과 갈등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교와 <에로스>가 양립할 수 있는지 또는 지속적인 전쟁 없이 공생할 수 있는지는 전혀 분명치 않다. 시인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사람은 톱니바퀴와 같은 일관작업에 있어서 위협적 존재이다. 에로스는 현존하는 형태들을 부수고 새로운 형태들을 창조하는데 이것은 자연적으로 기교에 대한 위협인 것이다. 기교는 규칙과 예측 가능성을 필요로 하며 시간 계획에 따라 운용된다. 야성(野性)의 에로스는 시간의 모든 개념과 제한에 대항하여 투쟁한다.
에로스는 문화 창조의 추진력이다. 그리고 문화는 자기의 조상인 에로스에 작용하여 에로스적 충동을 훈련시킨다. 이러한 사실은 의식의 고양과 확장을 고무한다. 에로스적 충동은 몇 가지 규율을 행할 수 있고 행해야만 한다. 모든 충동의 자유로운 표현이라는 복음은 마치 둑이 없는 강물이 사방으로 넘쳐흘러 낭비되듯이 경험을 여기저기로 분산시키기 때문이다. 에로스의 규율은 우리가 발전할 수 있고 우리들을 모든 견디기 어려운 불안으로부터 막아 주는 <형식들>을 제공한다. 프로이트는 에로스를 규율하는 일은 문화를 위해 필요하며 그것은 문화 창조의 힘인 에로스적 충동의 억압과 승화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프로이트와 몇 번 안 되는 의견의 일치를 보였던 드 루쥐망도 이 의견에는 뜻을 같이 했다. 그는 잊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위 청교도적 경향이라 불리는 성적 규율이 유럽의 초창기부터 우리에게 부과되어 오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리 문명은 저개발국이 라고 알려진 국가들보다 더 발전된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며 의심 할 여지없이 더 낙후되었을 것이다. 즉, 현대 세계를 낳은 일, 곧 조직화된 노작(勞作)뿐만 아니라 테크놀로지 (technology)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에로티시즘의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에로틱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순진하게도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자기네들이 시적이고 도덕적인 정열에 대해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은 시적이고 도덕적인 정열을 <인생의 사실들>의 본질로부터 소외시키고 있으며 그들의 콤플렉스는 경제사회, 문화와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기술에 대한 숭배가 감정을 파괴하고 정열을 침식하며 개인의 정체성을 말살한다는 문제점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현대의 기술적 서구인들이 직면한 도전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리 기술적으로 유능하다 할지라도 에로스가 없다면 단순한 흘레의 갈등에 좌절된 나머지 결국 성불능자가 되는 것이 다. 그는 자기가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도취될 힘을 잃는다. 이러한 점에서 기교는 의식을 축소시키고 에로스를 감퇴시킨다. 도구는 더 이상 의식의 확대일 수 없고 단지 그것의 대체물일 뿐이며 사실 의식을 억압하고 단절하는 경향을 띤다.
문명은 항상 사회가 다시 해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에로스를 길들여야만 하는가? 헤시오드는 창조력이 작용하고 사람들이 혼란 속에 살면서도 그 혼란을 어떤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야만 했던, 강렬하게 불화가 조장되면서도 문화의 근원과 또한 잉태와 탄생의 순간에 보다 근접했던 시기인 BC 6세기에 살았다. 그러나 안정에의 욕구가 점차 늘어감에 따라 에로스의 다이몬적이고 비극적인 요소들은 묻혀져 갔다. 바로 여기에 문명 몰락의 비밀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쇠잔한 아테네인들이 그들보다 원시적인 마케도니아인임을, 이번에는 마케도니아인들이 로마인임을, 그리고 로마인들은 훈족임을 자처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황인종과 흑인종임을 자처할 것인가?
에로스는 문화의 생명력의 핵심이며 그 심장이요 영혼이다. 따라서 긴장의 방출이 창조적인 에로스의 자리를 차지할 때 문명의 몰락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