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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 섹스와 상충하는 에로스
사랑의 신 에로스는 대지를 창조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 이전에는 만물은 침묵했고, 황량했으며, 움직임도 없었다. 이제 만물은 생기에 넘치고. 환희에 차고, 움직임을 갖게 되었다.
― 전기 (前期) 그리스 신화
아프로디테와 아레스 사이에서 여러 명의 아름다운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들의 작은 아들 에로스는 <사랑의 신>으로 불리게 되었다. 두 번째로 태어난 이 아이는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자라났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키가 자라지 않았다. 그러나 비단 같은 날개와 장난기 넘치고 보조개가 팬 얼굴에 키가 작고 홍조를 띠며 몸이 토실토실한 어린아이였다. 그의 건강에 놀란 아프로디테는 테미스에게 의논했다. 이에 테미스로부터 신탁(神託)이 왔다. <정열이 없으면 사랑은 성장할 수가 없다>.
― 후기 (後期) 그리스 신화
앞 장에서 우리는 섹스와 사랑에 관한 현대의 패러독스 속에는 <섹스와 사랑의 진부화>라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더 훌륭한 성행위를 하기 위해 감정을 마비시킴으로써, 용기와 정체성(주체성)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섹스를 사용함으로써, 예민한 감수성을 감추기 위해 관능성을 이용함으로써 우리는 섹스를 거세했고 무기력하고 공허한 것으로 버려두었다. 섹스의 진부(陳腐)화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교묘하게 교사되고 조장되었다. 거리에 범람하는 섹스와 사랑에 관한 수많은 책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즉, 그 책들은 그 주제를 마치 테니스 치는 법을 배우는 일, 그리고 생명보험에 가입하는 일과 동일한 것으로 다룸으로써 사랑과 섹스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에로스를 회피함으로써 섹스로부터 힘을 박탈했고 그래서 섹스와 에로스를 모두 비인간화시키는 것으로 끝맺었다.
이 장에서의 나의 주제는 섹스의 거세 밑에 깔려 있는 것이 <섹스의 에로스로부터의 분리>라는 점이다. 우리는 사실 섹스를 에로스에 <대항하는> 것으로 설정했고 바로 불안을 만들어 내는 에로스에의 참여를 피하기 위해 섹스를 사용했던 것이다. 겉으로는 계몽된 섹스에 관한 논의에서, 특히 검열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것은 에로스에 관한 표현의 완전한 자유라는 점이 종종 주장되었다.
그러나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학, 연극 심지어는 자연 과학적 탐구의 본질에서까지 드러난 바와 같이 우리 사회 표면의 바로 밑에서 나타나는 바는 이와 정반대이다. 우리는 에로스로부터 도주하고 있으며, 섹스를 에로스로부터 도주하는 교통수단으로 이용한다.
섹스란 에로스가 불안을 창조하는 측면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말살해버리기에 가장 편리한 약(藥)이다.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욱 섹스를 좁은 뜻으로 정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시 말해서 섹스에 대해 편견을 가지면 가질수록 섹스가 뿌리내리고 있는 인간의 경험은 그만큼 더 단편화되고 왜소화되었다. 우리는 에로스가 가진 정열을 회피하기 위해 섹스의 흥분 속으로 도망친다.
1.1. 억압된 에로스의 돌아옴
나의 논제는 환자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내가 관찰한 몇 가지의 이상한 현상들, 즉 기묘하게 폭발적인 성질을 가진 마음의 분출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어떤 상식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영역에서 일어났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기술이 발전함으로써 사실상 원치 않는 임신과 성병의 위험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그리하여 섹스와 사랑에 대해 느끼던 불안은 영원히 박물관 속으로 추방되었다는 확신 속에 살고 있다. 19세기의 소설가들이 묘사했던 섹스와 에로스의 문제, <주홍글씨>에서와 같이 한 여자가 남자에게 스스로를 주었을 때 그것은 불법적인 사생아의 잉태와 사치적 추방을 뜻했다든지, <안나 카레니나>에서와 같이 가정의 비극적 파탄과 자살, 또는 섹스 매매 시장에서와 같은 성병 등은 이제 옛것이 되어 버렸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하나님과 과학의 덕택에 그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났다고 말한다. 이 말은 곧 섹스는 자유롭고, 사랑은 쉽고 학생들이 <인스턴트 선(禪)>이라고 부르는 바와 같이 언제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꾸러미로서 즉시 다가온다는 뜻을 담고 있다. 흔히 비극적이고 다이몬적인 요소들과 연관되어 있던 보다 깊은 갈등에 대한 어떠한 얘기도 시대착오적이고 불합리한 얘기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나는 거대하고 광대한 억압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 갈려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묶는 결례를 범하고자 한다. 섹스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육체의 화학 작용의 밑바탕에 갈려 있는 어떤 것에 대한 억압, 섹스보다 더 생명적이고, 깊고, 포괄적인 어떤 마음의 욕망에 대한 억압, 다시 말해서 확실히 사회적으로 승인되고 있는 억압, 승인되고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보다 구별해 내기 어렵고 더욱 영향력을 행하는 억압 말이다. 나는 현대의 의학적 심리학적 진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이 올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임약과 여성 발정 호르몬, 그리고 성병 치료법의 발달에 대해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또한 나는 경직된 관습을 지닌 빅토리아 시대보다는 자유로운 가능성을 지닌 이 시대에 태어 난 것을 매우 운 좋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사람들을 매혹하고 그들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게 하고 있다. 우리들의 문제는 또다 깊고 완전히 현실적인 것이다.
우리는 조간신문을 집어 들고 계몽이 되었다는 미국에서 해마다 백만 건 이상의 불법 낙태가 행해지고 혼전 임신이 도처에서 늘어나고 있다는 기사를 읽는다. 오늘날의 통계에 따른다면 이제 열세 살 난 소녀들 여섯 가운데 하나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불법적인 임신을 하게 되는데, 이는 십년 전에 비해 두 배 반이나 되는 숫자이다. 이러한 증가는 주로 하류 계층의 소녀들에게서 뚜렷하지만 중상류 계층의 소녀들도 상당한 증가를 보이고 있는 바, 이는 이 문제가 궁핍한 계층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 푸에르토리코나 흑인 소녀들뿐만 아니고 <백인> 소녀들 사이에서의 이러한 불법 임신의 뚜렷한 증가는 전체 임신에 대해 l0년 전에는 l.7퍼센트였는데 작년엔 5.3퍼센트에 이르렀다. 우리는 <산아 제한>을 하면 할수록 불법 임신이 늘어가는 기묘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독자들은 진정 필요한 것은 야만적인 낙태 금지법을 개정하고 성교육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라고 외칠 것이다. 나도 반대하진 않지만 하나의 경고를 헤야만 하겠다. 맹목적인 성교육 강화 주장이 우리 스스로에게 보다 무서운 질문을 제기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한 자기 위안으로 삼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의식적, 합리적 지향의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내가 뒤에서 지향성이라 부르는 보다 깊은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닐까?
보기를 들면, 케네드 클라크는 하류 계층의 흑인 소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하류 계층의 흑인 여성들은 자기의 섹스를 인간적인 긍정을 얻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자기가 누구에겐가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아기는 그녀가 여성이라는 것의 상징이며 그녀는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를 가짐으로써 만족해한다. 자기 정체성과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한 이러한 투쟁은 하류층의 소녀들에겐 보다 노골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으로 보다 재치 있게 행동함으로써 그것을 감출 수 있는 중류층의 소녀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내가 다루었던 중상류층의 배경을 가진 한 여성 환자의 보기를 보자. 그녀의 아버지는 작은 도시에서 은행가였으며 어머니는 누구에게나 항상 기독교인다운 태도로 대했지만 치료 과정에서 나타난 데이터로 보건대 상당히 완고했고 딸을 낳았을 때 이 아이를 갖게 된 것을 원망했던 것 같다. 그 환자는 훌륭히 교육받았고, 삼십 대 초반에 이미 커다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성공하였으며, 섹스나 피임에 대한 지식도 조금도 결여된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치료를 받기 여러 해 전인 이십 대 중반에 두 번이나 불법적인 임신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두 번의 임신은 모두 그녀에게 죄책감과 갈증의 고통을 가져다 줬다. 그러나 그녀는 첫 번째 임신 후에 곧 또 다시 임신을 했고, 그녀는 이십 대 초에 약 2년간 결혼 생활을 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처럼 지성인이었으며 정서적으로 초연한 남자였다. 그들은 쌍방 모두 상대방이 결혼 생활에 활기를 불어 넣고 어떤 의미를 주입시키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종류의 공격적인 잔소리를 했다. 이혼 후 혼자 지내는 동안 그녀는 스스로 맹인에게 밤에 이따금씩 책을 읽어주는 일을 했는데, 자기가 책을 읽어주던 젊은 맹인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과 이에 따른 낙태는 그녀를 크게 동요시켰으며 그녀는 첫 번째 낙태 직후 또 다시 임신하게 되었다.
우리가 이런 행동을 <성적 욕망>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불합리한 얘기다. 사실 그녀가 성욕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녀이게 임신을 초래한 성관계로 인도하는 데 더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녀의 임신의 역학 관계를 발견해 내고자 한다면, 그녀가 자기 스스로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는 지와 그녀가 자기의 세계 속에서 자신에게 의미 있는 위치를 찾고자 노력했던 방법에 대해서 살펴봐야만 할 것이다.
진단학적으로 말한다면 그녀는 이른바 전형적인 현대의 정신분열증적 성격이었다. 즉 지성적이고, 영민하고, 유능하며, 일에 있어서는 성공적이나 인간적 교제에 있어서는 괴리되어 있고, 친밀한 관계를 두려워하는 특성이 있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언제나 자기 것에 대해 결코 크게 느끼지 못하거나 환각제(LSD)를 복용했을 때조차 어떤 것도 영속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텅 빈 인간으로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향해 자기에게 열정과 활력을 달라고 외치는 형(型)의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매력적이기 때문에 많은 남자 친구가 있었지만 그들과의 관계 또한 <메말라 붙은> 것이었고 그녀가 열렬히 갈망했던 열정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녀는 당시 가장 친밀했던 한 남자와의 동침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그들은 마치 서로 온기를 얻기 위해 달라붙어 있는 동물과 같았고 그녀의 감정은 일반화된 절망, 바로 그것이었다 한다. 치료받기 시작한 초기에 그녀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은 여리 가지 형태로 반복되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부모들이 있는 옆방에 있었고 두 방 사이에는 천정까지 완전히 막히지는 않은 벽이 있었다. 그 꿈속에서 그녀가 아무리 벽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렀어도 옆방의 부모들에게 들리게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녀는 미술 전람회장에서 바로 치료를 받으러 나에게 왔는데 자기 자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상징적 그림을 그곳에서 발견했노라고 말했다. 에드워드 호퍼의 고독한 사람 하나씩만을 화폭에 담은 그림이었다. 그 가운데 한 그림은 불이 밝게 켜졌고 사치스러우며 완전히 텅 빈 극장에 안내양이 혼자서 앉아있는 모습이, 또 어떤 그림에는 철이 지나 황량한 해변의 빅토리아풍 주택 이층 창가에 혼자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나머지 그림에는 그녀가 자라난 작은 도시의 집들과는 다른 어떤 집 현관 앞의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외로운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사실 호퍼의 그림들은 저 상투적 문구인<소외>와 관계되는 조용한 절망, 즉 인간의 감정과 동경의 공허화에 통절한 의리를 부여해 주고 있다.
그녀의 첫 번째 임신이 <눈 먼> 인간과의 관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녀가 맹인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싶어 했고 스스로에게 뭔가를 입증하려 한 그녀의 기본적인 관용으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임신하게 되는 그 사건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맹목적인> 분위기에 의해 큰 충격을 받는다. 그녀는 우리의 풍요와 기술적 힘의 세계,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볼 수 없고, 그녀, 또는 그를 느끼기 위해 남의 육체에 손을 대지만 자아를 밀폐하는 우리들 자신의 어두움으로 인해 인지할 수가 없는 소경의 더듬거림일 뿐인 눈먼 세계에 들어온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는 그녀가 (1) (그녀의 남편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자존심을 확립하기 위해 (2) (만약 우리가 자궁 <히스테리>를 정서적 공허의 상징으로 간주한다면 임신은, 그 자궁을 꽉 채움으로써 문자 그대로 그 공허를 보상해 주므로) 정서적 빈곤감을 보상하기 위하여, (3) 그녀의 아버지, 어머니와 숨통을 죄는 위선적인 중산 계층적 배경에 대한 그녀의 공격을 표현하기 위해 임신하게 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하다.
그러나 합리적이고 선의적인 지향을 가리는 그녀 속의, 그리고 우리 사회 속의 자기 모순이 요구하는 도전, 또 실제로 그 자기 모순을 만들어내는 보다 심층적인 도전은 무엇일까? 이 여자, 또는 어떤 여자라도 여자가 임신하는 것은 단순히 좀 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이 여자는 그녀와 같은 중류나 상류층의 여자들에게 피임약이나 성에 대한 지식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잘 알려져 있는 시대, 그리고 사회가 섹스에 대한 불안은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사방에 선포하고 그녀에게 사랑에 관한 모든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부추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바로 이 새로운 자유로부터 나오는 불안은 과연 어떤 것인가?> 불안은 개인의 의식과 개인적 선택 능력에 무거운 짐을 지우며 그 짐은 해결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실로 대단히 큰 짐이다. 또한 고도로 세련되고 계몽된 이 시대 속에서 불안은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은 <마땅히> 자유롭고 억제가 없어야만 하므로) 빅토리아 시대의 신경질적인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행동으로 분출시킬 수도 없으며, 따라서 내부로 침투하여 19세기 여인들의 행동의 억제 대신에 <감정>의 억제, 즉 <정열>을 질식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이런 상태에 놓인 소녀들이나 여인들은 그들 자신과 우리 사회 속의 거대한 억압, 즉 에로스와 열정에 대한 억압과 섹스를 억압의 기술로 지나치게 사용하는 폭거의 부분적인 치생물이라고 믿는다. 이의 당연한 귀결로서 우리의 <교조적 계몽>은 그 속에 바로 이 새롭고 내면적인 불안을 충족시키는 수단을 박탈하는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억압된 것의 회귀>, 즉 섹스에 의해 사방에서 아무리 유혹받는다 하더라도 부정될 수 없는 에로스의 회복, 바로 우리의 감정의 움츠림을 속이도록 면밀히 고안된 원시적인 방법으로 억압된 것의 회귀를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남성에 대한 치료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정신분석을 수련 중인 한 젊은 정신가 의사는 자기가 호모 섹스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 이십 대 중반기에 있는 그는 여자와 성관계를 가진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호모 섹스를 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가 호모 섹스의 전조(前兆)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남자에 대한 접근 경험은 있었다. 그의 치료 중에 그는 한 여자와 알게 되었고 그들은 성관계를 갖게 되었는데 적어도 그 절반 정도는 피임법을 쓰지 않았다. 나는 여러 번 그에게 그녀가 틀림없이 임신하게 될 것이 라고 주의를 주었고, 그 또한 수련의로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나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내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피임법을 사용하지 않은 채 성관계를 지속했다. 한번은 그 여자가 월경의 주기를 건너뛰게 되자 그는 매우 걱정했으며 나 또한 은근히 걱정이 되었고 그의 어리석음에 화가 나기까지 했다. 그때 나는 순진하게도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자네 그녀를 임신시키려고 했었군 그래"라고 찔러봤다. 그는 처음에는 내 말을 단호히 부정했으나 잠시 숨을 돌리며 내 말의 진실성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방법에 대한 이 모든 얘기와 그들이 행해야만 했던 일은 물론 별개의 문제였다. 그때까지 자신이 남성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던 그에게 있어서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 단순한 능력보다는 여자에게 임신을 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보다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있었으므로) 어떤 생명적 욕구가 그에게 그저 자신이 남성임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고, 기본적 생산 과정을 체험하고 스스로를 어떤 원시적이고 강력한 생물학적 과정에 내던지고, 우주 속의 어떤 보다 깊은 맥박에 참여하도록 몰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환자들이 바로 이러한 인간적 경험의 보다 깊은 뿌리를 박탈당했다는 점을 보기까지는 이 문제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많은 불법적인 임신(또는 그 등가적인 것들) 속에서 정서를 없애 버리고 기술을 감정의 대체물로 간주하고 사회적으로 고착화된 체계에 대한 도전, 인간을 무미건조하고 무의미한 존재로 보고 그들에게 특히 젊은 세대에게 불법적 낙태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비인간화의 체험을 주는 사회에 대한 도전을 관찰한다. 환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본 사람이 라면 누구나 육체적인 고통보다 심리적, 정신적, 비인간화의 고통이 훨씬 더 참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종종 즐거운 위안의 방법으로 육체적 고통(또는 사회적 추방이니 폭력, 비행)에 매달리기도 한다. 한 여자가 반드시 생태심리 학적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무감정한 존재의 무미건조한 사막을 부수기 위해, (T.S. 엘리엇이 그의 부유한 매춘부로 하여금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라고 소리치게 했던 것처럼 “우리는 내일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절망의 공허를 회피하기 위하여 흘레의 반복적 패턴의 일부라도 한번 깨뜨려 보기 위해 임신을 <동경>할 수 있고, 또 실제로 임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우리는 <문명화>된 것일까? 또는 그녀의 심장이 결코 완전히 정열이 없는 상태로 전환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을 부정되게 하고 우리의 이 <차가운 천년 왕국> 시대 속에서 그녀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부정하는 것을 표출하기 위해 그녀가 임신한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가 된 것일까? 임신이란 <현실적인> 것이며 한 여자나 남자에게 <그들이> 현실을 살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소외란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는 능력의 상실이라고 느껴진다. 내가 들은 바로는 소외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러나 우리들의 메마른 목소리는 <깨어진 유리를 밟는 쥐의 발소리>와 같다. 우리는 서로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침대로 가고 너무 부끄러워 서로 상대방의 눈을 들여다볼 수가 없기 때문에 침대로 가며 침실에서도 서로 고개를 돌린다.
사람들이 소외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관습에 대해 반항이 제기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노력이 없는 덕>을, <위험 부담이 없는 섹스>를,<투쟁이 없는 지혜>를, <노력 없는 사치>를 약속하는 사회규범에 대한 도전이다. 이 모든 것은 <정열이 없는 사랑>, 급기야는 <감정이 없는 섹스>를 뿌리내리는 데 동의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이몬적인 것에 대한 부정은 오직 대지의 정령들이 우리를 따라다니며 괴롭히기 위해 새로운 얼굴로 돌아올 것이라는 점, 즉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소리가 들려올 것이며 어둠이 되돌아올 때 만약 백인 마돈나가 없다면 흑인 마돈나가 출현할 것이라는 점을 뜻한다. 우리가 빠져든 실수는 분명히 과학의 진보나 계몽이 아니라, 그것들을 섹스와 사랑에 대한 모든 불안을 통째로 덮어버리는 담요로 사용한 데 있다. 마르쿠제(Marcuse, Herbert)는 억압 없는 사회에 있어서 섹스는 발전해 감에 따라 에로스와 통합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그와는 정반대를 실현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즉, 우리는 섹스를 에로스로부터 분리시켰으며 또 에로스를 억압하려고 노력했다. 부정된 에로스의 한 요소인 정열은 그때 그 인간의 모든 존재를 뒤집어엎기 위해 그 억압으로부터 되돌아올 것이다.
1.2. 에로스란 무엇인가?
에로스는 오늘날 <에로티시즘>, 또는 유희와 같은 말로 간주되고 있다. <에로스>는 <최음제의 처방>과 <물음 : 바늘이 많이 달린 오스트레일리아산 돼지들은 그 짓을 어떻게 할까요? 답 :조심스럽게 합니다.> 따위의 문답기사를 싣고 있는 어떤 성적 비방<性的 秘方>에 관한 전문 잡지에 붙여진 제목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에로스가 성 어거스틴 정도의 인물이 의하면, 사람들을 몰아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나 아닌지 의아해 한다. 그런 엄청난 오해는 에로스의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만들기 십상일 것이다. 왜냐하면 자극이 지나친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더 이상 짜릿한 자극을 주지 못하는 자극에 대한 욕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중요한 용어의 뜻을 명확히 밝혀둘 필요가 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는 사랑의 신 에로스가 지상에 생명을 창조하였다고 말한다. 세상이 황량하고 생기가 없었을 때 <생명을 부여하는 화살을 당겨 대지의 차가운 가슴을 꿰뚫어 즉시 갈색의 지표(地表)를 찬란한 푸름으로 뒤덮게 만든> 것이 바로 에로스였다. 이것은 에로스가 섹스, 즉 꿰뚫는 그 남근적(男根的) 화살을 어떻게 생명을 창조하는 도구로 형상화시켰느냐 하는 것에 대한 상징적 설명이다. 그러고 나서 에로스는 남자와 여자의 형체로 만들어진 진흙덩이의 배꼽에 숨을 불어 넣어 <생명의 정기>를 주었다. 그 이래 에로스라는 말은 긴장의 방출이라는 섹스의 기능과는 대조적으로 생명의 정기를 부여해 주는 것으로 식별되어 왔다. 사랑의 신 에로스는 카오스, 대지의 어머니 가이아, 지옥의 신 타르타루스와 더불어 근원적인 네 명의 신 가운데 하나였다.
죠셉 캠벌은 에로스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지 간에 그로부터 생명이 나오는 선조요 근원적 창조자라고 말한다.
섹스는 생리학적 의미에 있어서 육체적 긴장과 그 긴장의 방출로 구성된 체계라고 매우 적절하게 규정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에로스는 인격적 지향(의도)과 행동의 의미를 경험하는 것이다. 섹스를 자극과 반응의 리듬이라 한다면 에로스는 존재의 상태이다. 섹스에서의 즐거움은 프로이트와 그 밖의 사람들에 의해 긴장의 정복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에로스에 있어 우리는 흥분으로부터 석방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매달리고 그 속에 빠지고, 심지어는 그것을 증가시키고자 원하는 것이다. 섹스가 지향하는 목표는 만족과 이완인 반면에 에로스는 원하고, 열망하고, 영원히 손을 뻗치고, 확대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전의 정의와 부합된다. 웹스터사전은 섹스를 (<분할>을 뜻하는 라틴어
이와 같이 섹스는 동물학적인 용어이며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킨제이는 동물학자였으며, 그의 직업에 걸맞게도 인간의 성행위를 동물학적 관점에서 연구했다. 매스터즈는 산부인과 의사이며, 따라서 섹스를 성기와 사람들이 성기를 어떻게 다루고 조작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연구하는데, 이때 섹스는 신경생리학적 기능의 모험이며 섹스의 문제는 사람들이 성기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 된다.
한편 에로스는 인간의 상상력으로부터 그 날개를 얻으며, 인간의 기계적 규칙들의 상위에 있는 궤도 속으로 즐겁게 날아 들어가 <성행위 방법서>들을 비웃으며, 성기를 조작하는 짓보다는 사랑의 행위를 하며 영원히 모든 기술을 초월한다.
왜냐하면 에로스는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이기 때문이다. 에로스의 본질은 성적 충동이 우리를 뒤에서 밀어대는 것인 반면에 에로스는 우리를 앞에서 끌어당기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나를 <유혹한다>, <꾀어낸다>, 또는 새로운 직업이 나를 <초청한다>고 말할 때 우리의 일상적 언어 속에서도 드러난다. 내 속의 어떤 것이 다른 사람, 또는 직업에 반응하고 나를 그 사람이나 직업 속으로 끌어당긴다. 나는 신경생리학적 차원뿐만 아니라 미학적 윤리학적 차원에서도 형식들, 가능성들, 의미의 보다 높은 수준들에 참여한다. 그리스인들이 믿던 바와 같이 지식은 그리고 윤리적 선(善)까지도 그러한 끌어당김을 행사한다.
에로스는 우리가 속해 있는 것과의 일치 ― 우리 자신의 가능성과의 일치,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아 충족을 발견하는 중요한 남들과의 일치 ― 를 지향하는 추진력이다. 에로스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아레테(arete), 즉 고상하고 선한 삶을 추구하는 데 바치도록 이끄는 열망이다.
섹스란 간단히 말해서 성기의 팽창(이것을 위해 우리는 즐거운 흥분을 추구한다)과 생식선(腺)의 충만(이것을 위해 우리는 분비물의 방출을 추구한다)에 의해 특징져지는 관계의 양식이다. 그러나 에로스는 방출이 아니라 세계를 개척하고, 창조하고, 형성하는 것을 추구하는 관계의 양식이다. <에로스에 있어서 우리는 자극의 증대를 추구한다.> 섹스는 요구이나 에로스는 욕망<慾望 desire>이며 사랑을 끌어들이는 것은 바로 이 욕망의 복합인 것이다. 섹스에 대한 미국인의 논의에 나타나는 오르가즘에 대한 집착에 관련하여 우리는 동물학적 생리학적 의미에서의 섹스 행위의 목적은 실제로 오르가즘이라는 점만은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에로스의 목적은 그렇지 않다. 에로스는 쾌락과 정열 속에서의 합일이며, 두 사람 모두의 존재를 확대하고 심화하는 <체험의 새로운 차원들>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증언뿐만 아니라 민간전승(民間傳承)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듯이 우리가 성적 방출 후에 잠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또는 농지거리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외박의 경우) 옷을 걸치고 집으로 가서 잠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공통된 체험이다. 그러나 에로스에 있어서 우리는 이와 정반대되는 것을 원한다. 즉,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중국인들이 <광채가 사방으로 뻗는> 경험이라고 부르는 프리즘의 항상 새로운 빛줄기를 기억하고, 음미하고, 발견하며 깨어 있고자 한다. 인간다운 애정의 계기는 바로, 이 같은 상대방과의 합일을 향한 충동인 것이다. 에로스란 ― 섹스는 그렇지 않다 ― 애정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합일, 즉 충만한 관계를 수립하려는 열망이다. 이것은 먼저 추상적 형태들과의 합일일 것이다.
보기를 들면 철학자 찰스 S. 퍼스가 코네티컷주의 밀포드에 있는 그의 집에 혼자 앉아 있었다고 해서 이것이 그로 하여금 에로스를 경험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철학자는 <학문 탐구라는 과업을 위한 참된 에로스에 의하여 고무되었음>이 틀림없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미적, 또는 철학적 형식들과의 합일이거나 새로운 윤리적 형식들과의 합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두 사람이 성적으로 합일하기 위해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으로 나타날 때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 두 사람은 모든 개인들이 그러하듯 우리가 지니고 있는 괴리감과 격리감의 극복을 염원하면서 그 순간 두 개의 분리된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진정한 합일로 이루어진 관계 속에 참여한다. 이때 새로운 형태, 새로운 존재, 새로운 자장(磁場)인 하나의 공유(共有)가 일어난다.
우리는 경제학적 생물학적 모형에 의해 사랑의 행위의 목적은 오르가즘이라고 오해하도록 이끌려 왔다. 프랑스에는 에로스와 관련하여 더욱 진실한 내용의 속담이 있다. <욕망의 목적은 그것의 충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연장에 있다>. 앙드레 모로와는 사랑의 행위에 있어서 오르가즘이란 목적이 아니라 우연한 결과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또 하나의 속담을 인용했다. “모든 시작은 아름답다.”
사랑의 행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은 사람들이 그 경험을 통해 기억하는 바와 환자들이 꿈꾸는 바에 의해 판정된 것과 같이 오르가즘에 이른 순간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발기된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질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인 것이다.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를 뒤흔드는 순간이며 커다란 경이와 황홀감과 전율을 느끼게 하는 순간인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되는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실망과 실의의 순간일 것이다. 이 순간은 사랑의 행위의 경험에 대한 두 사람의 반응이 가장 원천적이고, 가장 개인적이며, 진정 그들 자신의 것인 순간이다. 오르가즘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우리가 상대방을 얻었다는 것을 깨닫고 합일되는 순간인 것이다.
고대인들은 에로스를 신(god), 또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이몬(daimon)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인간 경험의 기본적 진실, 즉 에로스가 항상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초극하도록 몰아대는 것이라는 점을 전달해 주는 상징적 방법인 것이다. 괴테가 “여인은 우리를 천상으로 이끈다.”라고 한 것은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여인과 관계를 가질 때, 에로스는 우리를 천상으로 이끈다.>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한 진리는 한편으로는 내면적이고,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외면적이고 사회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객관적 세계 속에서의 우리의 관계 가운데서 통용되는 진리인 것이다. 반면에 섹스를 단순히 육체의 자연적 기능으로 당연시한 고대인들은 그것을 신으로까지 만들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안토니우스는 자기의 모든 성적 요구를 로마군을 따라다니는 애첩에게서 채우고 있었다. <에로스>가 그의 심상(心象) 속으로 들어가 그를 황홀하면서도 파괴적인 새로운 세계로 끌어들인 것은 겨우 클레오파트라를 만났을 때뿐이었다.
예술가들은 항상 본능적으로 섹스와 에로스 사이의 차이점을 알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의 친구 머큐시오는 로미오의 옛 애인에 관해 그녀를 현대의 해부학적 스타일로 묘사하면서 로미오를 놀려댄다.
나는 그대에게 로잘린의 빛나는 눈으로,
그녀의 넓은 이마와 주홍빛 입술로,
예쁜 발, 곧은 다리, 바르르 떨고 있는 그녀의 허벅지로,
그리고 바로 옆에 누워 있는 그녀의 가장 깊숙한 부분으로 마술을 건다.
― 제 2막 1장에서 ―
이것은 마치 현대의 사실주의적인 소설을 읽는 것과도 같다. 기대하던 <허벅지의 바르르 떨림>으로 끝나는 여주인공이 육체 묘사와 누워 있는 모습에 대한 암시가 특히 그렇다. 머큐시오는 사랑에 빠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외면적인 안목은 그 현상을 섹스로 보았고, 활기찬 베로나의 젊은 남자라면 누구나 여성의 아름다운 육체를 탐하던 것과 마찬가지의 탐욕으로 보았다.
그러나 당사자인 로미오도 그런 식으로 말했을까? 터무니없는 질문이다. 그는 줄리엣과 <에로스> 상태에 빠져 있었다.
오! 그녀는 횃불더러 활활 타오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녀는 마치 에티오피아인의 귀에 걸려 있는 값비싼 보석처럼
밤의 뺨에 매달려 있는 것 같구나.
써버리기엔 너무도 귀하고, 속세의 것이라기엔 너무도 고귀한
아름다움이여!
― 제 1막 5장에서 ―
로미오와 줄리엣이 각기 서로 반목하는 가문의 한 사람이라는 점을 상기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에로스는 적과 적 사이의 방벽을 뛰어넘는다. 사실상 나는 가끔 우리 내부에 있는 에로스가 적에 의해서, <특히> <적>에 의해 흥분되거나 자극받는 것이 아닌지 의아해 한다. 에로스는 이상하게도 외국인이나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계층, 피부 빛깔이나 인종이 다른 사람에게 얼을 빼앗긴다. 셰익스피어는 비극적인 것이긴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으로 하여금 그 이전엔 서고 싸우던 캐플렛가와 몬태규가를 화해시키고 베로나시(市) 전체를 합일시키게 함으로써 에로스의 의미에 충실했다.
1.3. 플라톤에 있어서의 에로스
우리 모두의 에로스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합일하고, 기쁨을 지속시키고, 의미를 심화시키고 이를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 하는 충동에 관한 고대로부터 내려온 지혜에는 훌륭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사람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내고 있는 기계나 짓고 있는 집이나 우리가 종사하고 있는 직업과 같은 객체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다.
우리들의 에로스에 대한 이해의 뿌리를 찾기 위해 아직도 사랑에 대한 통찰력의 현대성으로 인해 독자들을 놀라게 하고 즐겁게 해주는 <향연>편에 눈을 돌려보자. 흔히 역사상 가장 유명한 주연(酒宴)이라고 일컬어지는 잔치를 묘사한 이 플라톤의 대화편은 완전히 에로스에 대한 토론에 바쳐지고 있다. 무대는 아가톤의 집이며 거기에는 그 전날 아가톤이 비극 부문에서 수상한 것을 경축하기 위해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파네스, 알키비아데스 등이 초대받아 와 있었다. 에로스에 관한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돌아가며 얘기하는 동안 밤이 지샌다.
거기서 소크라테스는 “사랑이란 무엇인가?”라고 묻고서는 자기가 고명한 사랑의 교사 디오티마로부터 들은 대답을 인용한다. “사랑은 죽는 것도 죽지 않는 것도 아니며 이 둘의 중간이다‥‥‥ 사랑은 위대한 정령이며 모든 정령들과 마찬가지로 신적인 것과 죽는 것 사이의 중개자이다‥‥‥ 사랑은 사람들과 신들을 갈라놓는 깊은 구렁텅이 양쪽에 다리를 놓는 중재자이며, 그러므로 사랑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함께 맺어지는 것이다.‥‥‥”
에로스는 사람의 위에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신은 아니지만 모든 사물과 인간을 함께 맺어 주는 힘, 즉 모든 사물에게 (사랑을) <불어 넣는> 힘이다. 나는 <불어 넣는다>라는 말을 막연하게 쓰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적 형식을 부여해 준다는 의미, 즉 사랑을 바침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이나 대상에 대한 독특한 형식을 찾으려 하고 자기 자신을 그 형식과 합일시키려 한다는 의미이다. 플라톤은 계속해서 에로스는 인간의 창조적 정신을 만들어 내는 신, 또는 조물주라고 말한다. 에로스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의 성적 형태, 또는 다른 형태에 있어서 남과 합일하도록 밀어댈 뿐만 아니라 지식에 대한 바람을 고취시키고 정열적으로 진리와 합일을 추구하도록 밀어대는 충동이다. 에로스를 통해서 우리는 시인이나 발명가가 될 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선을 성취한다. 에로스의 형태를 취한 사랑은 생성시키는 힘이며 이 생성은 <하나의 영원성과 불멸성>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창조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항상 불멸에로 접근하도록 하는 것이다.
에로스는 생물학적 영역에서는 결합과 생식을 지향하는 충동이다. 디오티마는 말하기를 우리는 새나 동물에게서까지도 <출산의 욕구>를 볼 수 있으며, 그들은 “사랑이 라는 전염병에 걸릴 때 고뇌에 빠지는데 이 전염병은 결합하려는 욕구로부터 출발한다.”고 한다. 인간들은 항상 변화하고 있다.
털, 살, 뼈, 피, 그리고 육체 전체가 항상 변화하고 있다. 이는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습관, 기질, 의견, 욕구, 즐거움, 고통, 공포 등은 그 어느 누구의 경우에 있어서도 결코 동일하게 남아 있는 법이 없으며 항상 왔다가 가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의 경우도 동일한데 인간들에게 더욱 놀라운 사실은 과학이 일반적으로 솟아올랐다가는 쇠퇴할 뿐만 아니라 그것과 관련해서 우리도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변화 속에서 이러한 다양성을 한데 묶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에로스, 즉 우리 안에 있는 완전성에의 열망, 우리의 다양한 변화에 의미와 모형을 부여해 주고자 하는 충동, 무형성에 형식을 부여해 주고 분할하려는 추세에 맞서 통합을 부여하려는 힘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험의 생물학적일 뿐만 아니라 생리학적이고 정서적인 차원을 가져야만 한다. 그것은 에로스이다. 정신요법에 있어서 사람들이 건강해지게끔 촉진하는 것은 에로스이다. 긴장의 방출, 조정, 항상성 (恒常性:생체 안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경향)에 대한 현대의 신조와는 대조적으로 에로스 속에는 영원한 지향, 자아의 확장, 개인으로 하여금 언제까지나 진, 선, 미의 보다 높은 형태를 추구하는 데 헌신하게 하는 계속해서 새로 보충되는 충동이 있다. 그리스 인들은 이러한 자아의 계속적 재생이 에로스 속에 원래 내재해 있다고 믿었다.
또한 그리스 인들은 에로스에는 항상 성욕, 즉 그들의 칼로 육욕이라는 뜻으로 환원되는 경향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에로스에 있어서 생물학적인 것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고 <통합>되고 <초월>된다고 주장했다.
육체에 있어서만 임신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여자에게 몰두시키며 그 결과로 어린아이를 갖게 된다. 이것이 그들의 사랑의 특성이다. 그들이 희망하는 대로 그들의 아이들은 그들의 기억을 간직하고 그들이 장래에 소망하는 축복과 불멸성을 그들에게 부여해 줄 것이다. 그러나 임신하는 영혼은 (틀림없이 육체보다도 정신에 있어서 더 창조적인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영혼이 배태하고 내포하기에 적절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안다. 이러한 이해는 어떤 것일까? 일반적으로 지혜와 덕이다. 그리고 그러한 창조자들은 시인이며 창조자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예술가이다.
우리는 생물학적, 색욕적 에너지를 경험할 때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개방할 수 있고 상상력과 정서적 정신적 감수성을 통해 인간 세계와 우리 주위의 자연 세계에서 스스로를 넘어선 형식과 의미에 참여할 수 있을 때에도 에로스 안에 있는 것이다.
에로스는 하나로 묶는 데 있어서 탁월한 요소이다. 에로스는 존재와 생성을 연결하는 다리이며 사실과 가치를 함께 묶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에로스는 해시오드의 본래적 창조력인데 이제는 사람의 <내부>와 <외부> 모두에 있는 힘으로 바뀌어졌다. 우리는 이 책에서 제시하는 지향성의 개념과 에로스와의 사이에 많은 공통성이 있음을 본다. 두 가지 모두 인간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지식에 있어서도 자신을 대상과 합일시키려 나아간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과정은 사람이 이미 자기가 추구하는 지식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후에 성 어거스틴은 에로스를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에게로 나아가게 하는 힘으로 보았다. 에로스는 하나님과 합일하는 종교적 체험 또는 프로이트의 <큰 바다와 같은> 체험 속에서 나오는 신비한 합일에의 바램이다. 에로스는 또 니체가 <아모르파티>(amor fati)라고 부른 자기의 운명에 대한 사랑의 한 요소이기도 하다. 나는 운명이라는 말을 우리에게 떨어지는 특수하거나 우연한 불행이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유한적 상태 ― 우리의 지식이나 능력이 제한되어 있고 항상 약함과 죽음에 직면해있는 상태 ― 에 대한 승인과 긍정의 의미로 사용한다.
시지프 신화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적나라한 인간의 운명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카뮈는 그것에 대한 의식을 받아들일 용기를 갖춘 사람들을 위하여 그 운명 속에서 그의 에로스를 불러일으키는 사랑해야 할 어떤 것을 발견한다.
나는 시지프를 산 밑에 버려두었다‥‥‥ 그에게는 주재자 없는 이 우주가 메마르지도 않고 풍요롭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바위덩이의 원자 하나하나가 칠흑 같은 그 산의 광석 조각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정상을 향한 투쟁 그 자체는 인간의 가슴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사람들은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에로스는 자아 충족을 촉구하지만 그것은 수동적 세계에서 개인의 주관적 변덕이나 소망의 자기중심적 주장이 아니다. 자연이나 현실을 <주재한다>는 이념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리스 인들을 질겁하게 하고 당장에 후브리스, 즉 신에 대한 모욕이며 파멸을 초래하는 과대한 자만심이라는 딱지가 붙여졌을 것이다. 그리스 인들은 객체적, 주어진 세계에 대해 숭배에 가까운 존경심을 보였다. 그들은 그들의 세계 그것의 아름다움, 형태, 그들의 호기심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 탐험되어야할 신비에 탐닉했고 언제까지나 이 세계에 매료되었다. 인생 그 <자체>가 좋은 것, 또는 나쁜 것이라는 현대의 감상적 믿음과는 한 치도 같은 것이 없었다. 그것은 모두 사람이 자기 자신을 무엇에다 바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들의 비극적인 관점 자체가 그들로 하여금 사랑에 탐닉할 수 있게 했다.
당신은 <진보> 또는 재산의 축적에 의해 죽음을 뿌리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운명을 받아들이고 진정한 가치를 선택하며 있는 그대로의 당신의 존재와 당신이 그 일부를 이루는 세계를 기뻐하고 믿지 않는가? “사랑스러운 것은 영원토록 사랑받아서는 안 될 것인가?”라고 에우리피데스는 노래한다. 이 질문은 수사학적이지만 그 대답은 그렇지 않다. 사랑스러운 것은 유아적인 욕구 때문이 아니라, 또는 그것이 앞가슴을 나타내기 때문이 아니라, 또는 그것이 목적 없는 섹스이기 때문이 아니라, 또는 그것이 조정을 도와주기 때문이 아니라, 또는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받게 될 것이다.
사랑스러운 것은 우리에게 흡인력을 행사하며 우리는 사랑에 의해 생명을 갖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정신요법과 어떤 관계를 갖는가? 나는 대단히 많은 관계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믿기 어려울 만큼 간단히 말한 “인간은 에로스보다 더 나은 도움을 주는 사람을 쉽게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얘기를 정신적 건강을 향한 인간 내부의 충동뿐만 아니라 정신요법의 과정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우리가 <대화>에서 보고 듣는 바와 같이 소크라테스 자신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신요법의 표본인지도 모르겠다. <파이든>끝부분에서의 그의 기도문은 모든 정신요법 사무실 벽마다 붙어 있다.
사랑하는 목신(牧神) 판(Pan)이시여. 그리고 이곳에 계시는 모든 신들이시여, 내게 내적 영혼의 아름다움을 내려 주소서. 또한 육체와 영혼이 하나 되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지혜를 부귀로 여기고 중용이 곧 황금임을 알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