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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섹스와 사랑의 패러독스
성교는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적인 행위이다.
― 고대 중국 속담
한 환자가 다음과 같은 꿈을 이야기하였다. "나는 내 아내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내 회사의 경리 사원이 우리들 사이에 끼어 있더군요. 그는 아내와 성관계를 가지려고 하였지요. 그런데 내 기분이 이상해지더군요. 웬일인지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였거든요."
― 존 쉼멜 박사의 보고에서
서양의 전통에는 네 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다. 그 첫째는 <섹스>, 즉 이른바 색욕(色慾)이라고 하는 리비도이며, 두 번째는 <에로스>, 즉 생산하거나 창조하려는 사랑의 충동 즉, 그리스 인들이 표현했듯이, 더욱 높은 형태의 존재와 관계를 지향하는 충동이다. 세 번째는 <필리아>(philia), 즉 우정, 형제애이며, 마지막 네 번째는 <아가페>(agape), 즉 라틴어의 <카리타스>(caritas)인데 이것은 타인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는 사랑으로서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 그 원형이다. 모든 인간의 참된 사랑 경험은 이 네 가지가 각기 다양한 비율로 혼합된 것이다.
먼저 섹스로부터 시작해 보자. 그것은 우리 사회가 바로 섹스로부터 시작될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생물학적 존재의 시발점이 또한 섹스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각자의 존재는 역사상 어느 순간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T.S. 엘리엇의 표현대로, <욕망과 발작 사이의> 간격을 뛰어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섹스는 우리 사회에서 아무리 진부하게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관계없이 여전히 생식의 원동력, 종족을 영원히 존속시키는 추진력, 인간의 가장 강렬한 쾌락인 동시에 가장 깊이 스며든 불안의 원천인 것이다 섹스는 다이몬적 형태로서는 인간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수 있으며, 에로스와 결합될 때 그를 절망으로부터 끌어올려 황홀경에 이르도록 할 수 있다.
고대인들은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듯 섹스, 즉 색욕(色慾)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꽤 광범위하게 섹스를 우리의 주된 관심사로 삼고 사랑의 네 가지 종류를 모두 갖기 위해 이것을 요청하게 되었던 것은 비로소 현대에 이르러서였다. 그와 같이 섹스 현상에 대한 프로이트의 지나친 확대에도 불구하고 ― 이 점에서 그는 유일하게 현대 역사의 정립과 반정립의 투쟁을 대변한다. ― 성욕이 종족을 존속시키는 기본적인 힘이 되고 그가 부여했던 ― <확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명백한 진실이다. 우리 뜻대로 소설과 드라마에서 섹스를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거나, 또는 냉소적인 태도로써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대로 그것에 냉담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섹스의 힘으로부터 방어하려고 한들 욕정은 어느 때든지 우리가 방심한 틈을 타서 섹스가 여전히 <전율적인 신비>임을 기꺼이 입증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시대에 있어서 섹스와 사랑의 관계를 고찰하려는 순간 우리는 곧 모순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섹스를 둘러싸고 있는 기이한 패러독스들을 현상학적으로 간략하게 개괄함으로써 우리들의 처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1. 섹스의 황폐화
성적 충동, 감정, 그리고 욕구에 대한 부정이 생활의 한 태도였고 점잖은 모임에서 섹스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못하였던 빅토리아 시대에는 그러한 거부를 신성시하는 분위기가 모든 화제를 감싸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들은 서로 상대가 성기를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대했다. 다른 모든 분야에서 자기 시대를 훨씬 앞질렀던 저 가공할 만한 개혁 운동가 윌리엄 제임스도 섹스에 대해서는 그 시대의 특징이었던 점잖은 혐오감을 가지고 대했다. 그는 2권으로 된 획기적인 그의 저서 <심리학 원리>에서 단 한 페이지만을 섹스에 할애하고 있는데 그 마지막 부분에 “이런 항목들은 논의하기에 약간 불쾌한 것이다‥‥‥ .”
[숨은설명:시작]
[숨은설명:끝]
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빅토리아 시대보다 1세기 전에 “욕망이 있지만 행동하지 않는 자는 해독을 낳는다.” 라고 한 윌리엄 브레이크의 경고는 뒤에 정신요법학자들에 의해 충분히 입증되었다. 섹스를 고찰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인물 프로이트가 인체와 자아의 그렇게도 활력적인 부분을 절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야기된 신경증 징후의 혼란 상태를 진술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
그 후, 1920년대에 와서는 거의 하룻밤 사이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억압의 정반대가, 즉 성교육이나 말과 감정과 표현의 자유가 건전한 효과가 있으며 개화한 사람에게 유일하게 설 곳을 제공해 준다는 믿음이 자유주의적 서클들의 투쟁적인 신조가 되었던 것이다. 제 1차 세계 대전에 뒤이어 놀랍도록 짧은 기간에 우리는 섹스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한 행동으로부터 섹스에 사로잡힌 상태로 변모했다. 우리는 이제 고대 로마시대 이래 그 어떤 사회보다도 섹스에 더욱 많은 비중을 두게 되었다. 몇몇 학자들은 우리가 역사 전체를 통틀어 그 어느 때의 사람들보다도 더 많이 섹스에 몰두해 있다고 믿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섹스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만일 타임스 광장을 방문한 화성인이 있다면 그에게 우리는 섹스 이외에는 전혀 화젯거리가 없는 사람들로 보일 정도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미국인에게만 씌워져 있는 망령이 아니다. 보기를 들면, 바다 건너 영국에서도 <주교들로부터 생물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짓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타임스 리터럴이 서플리먼트>(The Times Literary Supplement)지의 정평 있는 1면 사설은 “킨제이 이후의 공리주의와 채털리(Chatterley) 이후의 도덕 향상 운동이 사회 전체를 범람하고 있으며, 어느 요일(특히 일요일) 어느 신문을 들추더라도 피임, 낙태, 간통, 도색적 출판물, 호모섹스 또는 현대 젊은이들의 도덕적 유형에 대한 자기주장을 펴고 있는 만물박사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급격한 변화 덕분에 오늘날 많은 정신요법 의사들이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프로이트의 신경질적인 환자들과 같이 성에 대한 억압을 드러내는 환자들을 좀처럼 보기 힘들어졌다. 사실 도움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은 그 정반대의 경우이다. 우리는 환자들에게서 섹스에 관한 대화가 무한정 허용되고 있으며, 성행위 또한 마찬가지이며 성행위의 회수나 상대방의 선택을 규제하는 문화적 금지 사항을 불평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의 환자들이 불평하는 것은 바로 감정과 정열의 결핍인 것이다. “이러한(섹스에 대한) 소란스러운 토론의 와중에서 풀리지 않는 것은 성의 해방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렇게도 많은 섹스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도 의미가 없으며 심지어는 재미(쾌락)조차 없다는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남자든지 여자든지 자기가 성적 감수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우리들은 성적 감수성이 없을 경우 이를 부끄러움으로 여긴다. 1910년 이전에는 어떤 숙녀더러 <섹시>하다고 하면 큰 모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숙녀는 그것을 찬사로서 고맙게 받아들이고 자기의 매력을 상대에게 발산할 것이다. 환자들은 흔히 불감증과 성불능의 문제를 지니고 있는데, 기이하고 가슴 아픈 점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교양 있는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섹스의 체험을 죄악으로 여겼으나 오늘에 와서는 체험하지 <않는> 것이 죄악인 것이다.
따라서 계몽 운동이 우리 문화에 있어서의 성적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은 하나의 패러독스이다. 계몽 운동은 확실히 개인의 자유를 증대시킨 점에 있어서 중요하고도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 왔다. 대부분의 외면적 규제들이 완화되어 성에 관한 책을 아무 서점에서나 구입할 수 있게 되었고, 피임약 또한 결혼 첫날밤의 영국의 백작 부인들처럼 “섹스는 너무 기분 좋은 것이어서 평민들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아직까지도 믿고 있는 보스턴을 제외하고는 어디서든지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두 남녀는 죄악감이나 결벽증에 얽매이는 일 없이 자기들의 성적 관계를 논의하고 섹스를 상호간에 보다 만족스럽고 의미 있게 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들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외면적인 사회적 불안과 죄악감이 감소되었음에도 이를 향유하지 못하는 사람은 둔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내면적> 불안과 죄악감은 오히려 증대되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이런 것들이야말로 더욱 병적이고 다루기 힘들며 개인에게 외면적 불안과 죄악감보다 훨씬 더 무거운 짐을 안겨 주고 있다.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받는 도전은 단순하고 직접적인 것이었다. 동침을 원하느냐 또는 원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 즉 문화적 관습에 대해 어떻게 처신하느냐 하는 직접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이제 남성의 질문은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할 수 있느냐 또는 할 수 없느냐”이다. 그 도전은 여성의 개인적인 적응력, 즉 대발작(大發作)과도 같은 자랑할 만한 <오르가즘>을 느낄 능력 쪽으로 옮겨간 것이다.
우리는 두 번째 질문이 성적 결단의 문제를 마땅히 자리해야 할 곳에 자리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할지라도 첫 번째 질문이 처리하기에 보다 쉽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나는 한 여인이 남자가 <내가 제대로 사랑의 행위를 하지 못하는 점을 발견할까 두려워> 남자와 동침하는 것을 무서워하는 임상 경험을 갖고 있다. 다른 한 여인은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녀의 연인이 이 점을 비난할까 두려워 섹스에 대해 불안해하였다. 또 다른 한 여인은 첫 번째 결혼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할까 두려워 재혼을 죽어라 하고 기피하고 있었다. 흔히 여인의 망설임은 <그가 다시 찾아올 만큼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식화될 수 있다.
과거 몇 십 년간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것 또는 행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의 잘못 탓이지 내 탓이 아니라고 자기 자신에게 말함으로써 사회의 엄격한 관습을 비난하고 자신의 자존심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가 행하고 싶은 것을 결정하거나 결정하게끔 하는 데 있어서 얼마간의 시간적 여유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행할 수 있느냐”라는 단순화된 질문과 직면하게 되면 자기 자신의 타당성과 자존심이 즉시 의문의 대상이 되며 만남의 모든 비중은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그 시험을 대처할 수 있느냐 라는 내면적 문제로 옮겨가게 된다.
여학생이 남학생의 기숙사에 머물러도 좋은 시간의 길이에 대해 대학 당국과 투쟁하는 대학생들은 기이하게도 규칙이란 흔히 자기들에게 이득일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어두운 것 같다. 규칙은 학생에게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시간을 준다. 그는 일에 앞서 책임지지 않고 행동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여유, 치수가 맞는지 맞춰 볼 여유, 시험 삼아 위험을 무릅쓰고 관계에 돌입할 여유를 갖는데 이와 같은 일들은 성장의 일부분인 것이다. 압력에 몰려 성적 관계에 들어가는 것, 즉 심리적 행위 없이 육체적 행위를 가짐으로써 자기의 감정에 폭력을 가하는 것보다는 직접적이고 개방적인 행위의 결핍이 차라리 낫다. 그는 규칙을 무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규칙은 최소한 무시 받을 어떤 구조를 제공해 준다. 그가 규칙에 복종하든 않든 간에 나의 주장은 진실이다. 새로운 성적 자유 때문에 불안해하는 현대의 많은 학생들은 이 불안을 억압하며 이 억압이 가져오는 여분의 불안을 보상하기 위하여 더 많은 자유를 주지 않는다고 대학 당국을 공격한다.
성에 관한 우리들의 근시안적 자유주의에서 우리가 보지 못한 점은 개인을 구속이 없는 자유 선택이라는 텅 빈 바다 속으로 밀어 넣는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자유를 가져다 주지는 않으며 오히려 내적인 갈등을 보다 증대시키기 쉽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몰두했던 성적 자유는 충분히 인간적인 것으로 되는데 실패한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는 우리는 그저 자유가 주어지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이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보기를 들어 드라마를 생각해 보자. 「성은 파멸됐는가.」라는 논평에서 전에 뉴욕타임스지(誌)의 드라마 비평을 맡았던 하워드 터브만은 우리 모두가 드라마에서 관찰한 바를 “섹스에 관계하는 것은 우울한 오후에 쇼핑가는 것과 같다. 욕망은 섹스와 아무런 관련도 없으며 호기심마저 사라졌다”고 요약했다. 소설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레온 에델은 “빅토리아 시대인들에 대한 반항으로 극단론자들은 제 세상을 만났다. 그 이래 그들은 소설을 살찌우기보다는 빈곤화시켰다.”라고 썼다. 에델은 전적으로 현실주의적인 <계몽>운동의 와중에서 소설은 섹스의 <비인간화>를 야기했다는 매우 결정적인 점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졸라의 작품에는 D.H. 로렌스의 어떤 작품보다도 더 많은 진실과 또한 인간성을 지닌 성적 만남이 있다”고 주장했다.
검열에 반대하고 표현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투쟁은 착실히 승리해야할 거대한 전쟁이었으나 이것이 이제는 새로운 구속용 자켓이 되지나 않았는가? 소설가와 극작가 등의 작가들은 “등장인물의 성적 행위에 대한 아낌없는 해부학적 기록의 의무적인 장면들이 없는 원고를 내놓느니보다는 타이프라이터를 부숴 버리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우리들의 <교조적 계몽>은 자멸하고 있다. 이 성적 계몽 운동은 성적 정열을 보호하기 위해 출발했지만 이제 그것을 파괴하는 것으로 끝장을 맺고 있는 것이다. 사실주의적 기록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우리는 연극 무대와 소설, 심지어는 정신요법에 있어서조차도 상상력이 사랑의 생명의 피이며, 사실주의란 성적인 것도 에로틱한 것도 아니라는 점을 망각했다. 사실, 나체주의자들의 캠프에 머물러 보면 아는 바와 같이 완전한 나체보다 <덜> 섹시한 것은 없다. 생리학과 해부학을 인간과 인간 사이를 관통하는 체험, 즉 우리를 뒤흔들고 매혹시키는 힐을 지닌 무수한 형태의 예술, 정열, 에로스로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상상력의 개입(이것을 나는 뒤에 <지향성>이라 부를 것이다)이 필요한 것이다. 자신을 순전한 사실주의적 세부 묘사로 전락시킨 <계몽> 그 자체가 인간의 상상력과 에로스적 정열의 관계에서 수반되는 불안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던가?
1.2. 테크닉을 통한 구원
두 번째 패러독스는 <섹스에 있어서의> 기술과 사랑의 행위의 <맞불>(back-fire)에 대한 새로운 강조이다. 나는 가끔 사람들에게 읽히는 성행위 방법서나 성행위에 관한 기사를 실은 신문의 양과 관계자들이 경험하는 욕정 또는 심지어 쾌락 사이에는 역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골프를 치는데 있어서나 연기를 하는데 있어서나 사랑의 행위(love-making)를 하는데 있어서 테크닉 자체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러나 섹스의 테크닉을 어떤 한계 이상으로 강조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에 대한 기계적 태도를 만들어 내며 소외, 고독감, 비인간화를 가져온다.
그 소외의 일면은 능숙한 기술을 갖춘 애인이 고도의 효율성을 지닌 컴퓨터 운전기사에 의해 대치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두 남녀는 사랑의 행위에 있어 킨제이가 확인하고 표준화한 실천 방법에 따른 숫자와 시간표를 크게 강조한다. 그 스케줄에 뒤질 경우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침대에 가기를 불안해하고 조급해 한다. 나의 동료 존 쉼멜 박사는 “나의 환자들은 배우자의 파괴적인 취급을 금욕주의자와 같이 놀랄 만큼 잘 견뎌내지만, 그들의 행위가 성행위 시간표에 뒤질 경우 이를 사랑의 상실로 여겼다”고 보고했다. 남자는 그 시간표와 척척 맞아떨어지는 행위를 못 할 경우 남자 구실을 상실한 것으로 느끼며, 여자는 최소한 자기에게 동침을 요구하는 남자가 상당 기간 없을 경우 여성다운 매력을 잃은 것으로 생각한다. 여자들이 자기들의 연애 사건에 대해 사용하는 <남자들 사이>란 말은 연극의 <막간>처럼 시간상의 공백을 나타낸다. 금주에는 몇 회나 했는가, 그(또는 그녀)는 밤 동안에 내게 열중하고 있었는가, 전희는 만족할 만큼 길었는가 하는 따위의 치밀한 계산 장부는 이 가장 자발적인 행위의 자발성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인지 의심스럽게 한다. 프로이트가 우리들의 부모들이 그렇게 했다고 말한 사랑의 행위 드라마의 무대 양쪽 끝을 이제는 컴퓨터가 배회하고 있다.
테크닉에 대한 이 같은 편견에 입각할 때 사랑의 행위에 관해 전형적으로 던져지는 질문이 “그 행위에 정열, 의미 또는 즐거움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나는 그 행위를 얼마나 멋지게 해냈는가!”라는 사실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시릴 코놀리가 <오르가즘의 폭군>이라고 부른 것과 소외의 또 다른 일면인 오르가즘의 동시적 성취라는 편견에 대해 살펴보자. 고백하건대 나는 사람들이 <묵시적 오르가즘>에 대해 얘기할 때 왜 저렇게들 그것을 얻으려고 발버둥치는가, 저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의 심연과 내적 고독의 공허감을 오르가즘이라는 거창한 효과에 매달림으로써 덮어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곤 한다.
일반적으로 섹스가 많을수록 그만큼 더 즐거워진다는 태도를 지니고 있는 성 의학자들조차 오르가즘의 성취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상대방을 <만족시켜 주는> 것을 그렇게도 중요시하는 요즘 풍조에 이맛살을 찌푸린다. 남자는 여자에게 <그것을 해냈는지>또는 <만사가 다 잘 되었는지>또는 다른 완곡한 말로 물어본다. 완곡어법이 불가능한 것인데도 말이다. 우리 남자들에게 시몬느 보봐르와 사랑의 행위를 설명하려 시도하는 다른 여성들은 그런 질문이야말로 그런 순간에 여자에게 던져서는 안 될 질문이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나아가서 기교에의 집착은 여성으로부터 그녀가 정서적, 육체적으로 무엇보다도 원하는 것, 즉 절정의 순간에서의 남성의 무의식적 방기(放棄)를 박탈해 버린다. 이 자기 방기는 그녀와 그 체험이 낳을 수 있는 모든 전율과 환희를 그녀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다. 역할과 실행에 관한 무의미한 횡설수설을 모두 제거해버릴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들이다. 즉, 관계의 친밀감이라는 순수한 사실 ― 만남, 어디로 이끌어 갈지 알 수 없는 흥분을 수반하고 있는 점층적인 접근, 자아의 주장과 자아의 양도 ― 이 놀랍게도 성적인 만남을 잊혀지지 않게끔 하는데 몹시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생이 가져다주는 어떤 열기에 의해 따뜻해질 필요를 느낄 때 우리로 하여금 거듭 기억 속의 그 사건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 친밀감이 아닌가?
인간관계를 성립시키는 요소 ― 취미, 미래에 대한 희망, 환상, 꿈, 과거의 고통의 공유 ― 가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동침하는 것보다 더 부끄럽고 상처받기 쉽게 한다는 점은 우리 사회에 있어서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들은 성적 친밀감에 있어서 육체적 벌거숭이보다 심리적, 정신적 벌거숭이가 되는 것에 더욱 신경을 쓴다.
1.3. 새로운 청교도주의
세 번째 패러독스는 우리가 매우 자랑하는 성적 자유가 새로운 형태의 청교도주의로 판명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원래의 청교도주의(Puritanism)와 혼동되길 원하지 않으므로 이 말을 소문자로 적는다.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속의 헤스터와 딤메스데일의 열정에서처럼 원래의 청교도주의는 이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나는 빅토리아 시대의 조상들을 통해 전래되었고, 산업주의 및 정서적 도덕적 괴리 현상과 연결되게 된 청교도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 청교도주의를 아래의 세가지 요소로 구성된 것으로 규정한다. 첫째 요소는 <육체로부터 소외된 상태>, 두 번째 요소는 <정서의 이성으로부터의 분리>, 세 번째 요소는 <기계로서의 육체 사용>이다.
이 새로운 청교도주의에서 나쁜 건강은 죄악과 동일시된다. 죄악이란 성적 욕망에 응하는 것을 의미해 왔으나 이제는 성적 표현을 충분히 갖지 못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우리 시대의 청교도들은 리비도를 표현하지 <않는>것은 부도덕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대서양의 양쪽에 모두 해당한다. 런던 타임스의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는 “진보적 지성인이 도덕적 의무감에서 누군가와 동침하려고 하는 것보다 더 우울한 광경은 없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정열을 통한 구원을 주창하는 사람보다 더 고상한 마음을 가진 청교도는 없다‥‥‥ ”라고 말한다.
이전에는 여자가 남자와 동침하는 경우에 죄책감을 느꼈었는데 이제는 여자가 몇 차례의 데이트를 하고서도 아직 주저하고 있는 경우에 막연하나마 죄책감을 느낀다. 그녀의 죄는 <주기>를 거절하는 <병적인 억압감>이다. 항상 완전히 개화된 (또는 최소한 외양상으로 고렇게 보이려고 하는) 그녀의 파트너는 그녀에게 노골적으로 화를 내어 그녀의 죄책감을 덜어 주려고 하지 않는다.(만약 그녀가 그 문제에 관해 그와 싸울 수 있다면 그 갈등은 그녀가 견디기에 훨씬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매 번의 데이트가 끝날 때마다 그녀가 그런 타락된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려는 십자군이라도 된 양으로 처신함으로써 그녀의 동침 거부를 대범하게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데 이런 태도는 물론 그녀의 <거절>을 더욱 큰 죄책감으로 몰아간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사람들이 성적으로 실행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정열 또는 동참(同參)에 빠지지 않으면서 그렇게 할 수 있게끔 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아마 파트너에게 불건전한 요구를 하는 행위라고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은 성관계를 갖지 않고 사랑하려 했으나 현대인은 사랑하지 않고 성관계를 가지려고 한다.>
나는 일단 우리 시대의 계몽된 사람들의 섹스와 사랑에 대한 태도를 인상파 풍으로 스케치함으로써 기분을 전환하려고 한다. 나는 내가 새로운 교양인(sophisticate)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대한 다음의 묘사를 인용하고 싶다.
새로운 교양인은 사회에 의해 거세되는 것이 아니라 오리겐(Origen 185? - 254?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처럼 스스로 거세한다. 섹스와 육체는 그에게 있어서 존재하고 살아가는 어떤 것이 아니라 TV아나운서의 목소리와 같이 갈고 닦아져야 할 도구이다. 새로운 교양인은 모든 정열을 뿔뿔이 흩뜨리는 도덕적 원리, 즉 그 누구를 사랑할 힘도 남기 않을 때까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도덕적 원리에 정열적으로 헌신함으로써 자기의 정열을 표현한다. 그는 자기의 정열이 가죽 끈에 매여 있지 않는 한 그것을 죽어라 하고 두려워하며 따라서 그의 총체적 표현의 이론은 순수하게 그의 가죽 끈이다. 그에게 있어서 자유라는 신조는 억압을 의미하며 완전한 리비도적 건강, 폭 완전한 성적 만족이란 에로스의 부정을 의미한다. 옛날의 청교도들은 섹스(性)를 억압했고 정열적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새로운 청교도들은 정열을 억압하고 성적이다. 새로운 청교도의 목적은 육체를 억누르고 자연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교양인의 <완전한 자유>라는 경직된 원리는 자유가 아니라 새로운 구속용 자켓이다. 그는 자기의 육체와 자연 속에 있는 자기의 공감적인 뿌리를 두려워하고, 그 토양과 자기의 생산력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는 자연을 제어하는 힘을 회득하는 일과, 더 많은 권력을 얻기 위해 지식을 획득하는 일에 헌신하는 현대적 베이컨 학파인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은 (저항할 열정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뿌리 뽑혀질 때까지 노예를 혹사하듯이) 정열을 완전히 분출시킴으로써 성욕을 제어할 힘을 회득한다. 섹스는 혈거인(穴居人)의 활과 화살, 쇠지레 또는 손도끼와 같은 도구가 되었다. 새로운 기계인 섹스는 <최후의 도구>인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청교도주의는 현대의 정신의학과 심리학에까지 잠입했다. 결혼한 부부의 상담에 관한 몇몇 책들은 임상의들이 성관계를 논할 때 다른 낱말을 사용하면 환자가 시치미 떼게 하는 것을 도울 뿐이므로, 오직 <흘레>(交尾 fuck)란 용어만 사용해야 하며 환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용어 자체의 사용이 아니며 확실히 순수하게 욕정적이며 동물적이지만 자의식이 있고, 그리고 마땅히 "흘레"라고 불려야 할 육체적 방기가 인간적 체험의 테두리로부터 제외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전에는 사용이 금지됐던 낱말이 이제는 오히려 사용하는 것이 <당위적인>, 정직의 도덕적 이유에 대한 의무로 변했다는 점이다. 확신하건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성적 긴장의 방출을 넘어선 인간적 관계의 친밀성일 때, 즉 내일 그리고 먼 후일에도 기억될 인간적 친밀성일 때, 성적 체험에 흘레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의 위장이다. 전자는 성적 억제에 봉사하는 위장이고 후자는 자기 소외에 봉사하는, 즉 친밀한 관계의 불안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려는 위장이다. 전자가 프로이트 시대의 특수한 문제였듯이 후자는 우리 시대의 특수한 문제인 것이다.
새로운 청교도주의는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의 비인간화를 수반한다. <사랑의 행위를 하는> 대신에 우리는 <섹스를 하며>, <성적 교섭> 대신에 우리는 <색을 쓰며>, <침대로 가는> 대신에 우리는 누군가를 <깔거나> 우리가 <깔린다>. <하나님이여, 우리와 함께 언어를 구해주소서!> 이러한 소외는 바로 오늘날 우리 시대의 양식이 되어서 어떤 정신분석 훈련 학교에서는 젊은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들에게 치료 과정에서 네 개의 글자로 된 말(fuck)을 사용하는 것이 <치료적>이라고 가르친다. 환자가 사랑의 행위 운운한다면 아마도 어떤 억압을 은폐하는 것이므로, 그에게 너는 단지 흘레(fuck)를 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는 것이 그들의 정당한 의무라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새로운 청교도주의의 화신인 셈이다. 모두들 빅토리아풍의 지나친 암전한 체하는 태도를 쓸어 없애는데 열중한 나머지 이 두 가지 낱말이 각기 다른 종류의 인간 경험을 언급한다는 점을 완전히 망각한 것 같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이 용어들에 의해 묘사되는 상이한 형태의 성적 관계를 경험했을 것이며, 이 두 가지 형태를 식별하는데 별 애로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 두 가지 상이한 경험에 대해 가치 판단을 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그 경험들은 각기 그 자체의 여러 종류의 관계에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부인은 때에 따라 <깔려지기>를, 다시 말해서 도취되고, 넋을 잃게 되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의 레트 버틀러와 스카렛 오하라간의 그 유명한 장면처럼 처음에 정열이 없을 때는 정열을 갖도록 <만들어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만약 <깔려지는> 것이 그녀의 성생활의 전부라면, 그녀의 인간 소외 체험과 섹스에 대한 거부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만약 임상의가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체험들을 분별하여 감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환자의 의식을 위축시키고 잘라내 버리는 역할을 하고 환자의 관계 능력뿐만 아니라 신체 지각(bodily awareness)의 협소화를 조장하게 될 것이다. 총체적으로 인간의 감정을 제한하고, 행위의 무한한 다양성과 풍요성을 가로막으며, 정서의 빈곤화를 조장한다는 것, 이상이 새로운 청교도주의에 대한 주된 비판이다.
새로운 청교도주의가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가운데 적개심을 더욱 축적시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적개심은 빈번히 성적 행위 그 자체에 연관되어 나타난다. 남이란 이용하고 난 후 버려야하는 것 이상의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멸시의 용어로서 우리는 “흘레나 붙어라” 또는 “니미 씹이다”하고 말한다. 여기서 생물학적 욕정은 극단적으로 펼쳐진다. 사실 흘레(fuck)라는 낱말은 현대어에서 극렬한 적개심을 표현하는 가장 일반적인 욕설인 것이다. 나는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4. 프로이트와 청교도주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새로운 자유주의 및 청교도주의와 어떻게 얽혀 있느냐 하는 점은 매력적인 이야깃거리다. 사회 비평가들은 칵테일 잔치에서 프로이트를 새로운 성적 자유의 으뜸가는 운동가 또는 최소한 최고의 대변자라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프로이트와 정신분석이 새로운 청교도주의를 반영하고 나타내는데 있어 그 <부정적> 형태와 <긍정적> 형태 모두를 반영하고 나타냈다는 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
정신분석적 청교도주의는 프로이트 자신에게서 보인 것과 같이 엄격한 정직성과 지적인 솔직성을 강조한 면에서는 긍정적이다. 그리고 육체와 자아를 옳든 그르든 <성적 대상>을 통해 만족을 얻는 기구로 보는 새로운 체계를 제공한다는 면에서는 부정적이다. 정신 분석에 있어서 섹스를 해소되어야 할 긴장이 라는 의미로서의 <필요>로 보는 경향은 새로운 청교도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현대 사회의 새로운 성적 가치가 정신분석적으로 합리화됐을 때 얼마나 기이하게 뒤틀리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이 문제를 탐구해야만 한다. 1936~37년에 미국 정신의학 협회의 회장을 역임한 C.맥피 캠프벨 박사는 정신분석의 철학적 측면에 대해 논급하면서 “정신분석은 무릎 위까지 오는 짧은 바지를 입은 캘빈주의”라고 통렬히 비판했다. 이 경구의 절반 정도만이 진실이지만 이 절반이 중요한 것이다. 프로이트 자신은 성격의 강인함, 정열의 통제, 강박적인 작업의 측면에서는 긍정적 의미로 청교도의 뛰어난 본보기였다. 그는 청교도 사령관인 올리버 크롬웰을 크게 찬미했는데 자기 아들 가운데 하나의 이름을 크롬웰의 이름을 따서 짓기까지 했다. 필립 리프는 그의 저서 <프로이트 : 도덕가의 정신>에서 프로이트의 이 같은 “전투적 청교도주의로의 이끌림은 당시의 유대인의 피를 이어받은 세속적인 지성인들 가운데서 흔하지 않은 일이었으며 특정한 신념 또는 신조 보다는 독립성 및 지적 정직성과 얽혀진 어떤 선택된 성격 유형을 나타내 준다.”고 지적한다. 그의 금욕적 작업 습관에서 프로이트는 청교도주의의 가장 중요한 면, 즉 <수도원으로서의 과학>의 사용을 보여준다. 프로이트의 강박적인 근면성은 그의 과학적 목표들을 달성하는데 혹독하게 봉사됐으며 그 목표들은 인생의 다른 모든 것을 초월하는(아마도 생명 그 자체를 초월하는) 것이었고 그는 그 목표들을 위해 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전적으로 현실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정열을 승화시켰다.
프로이트 자신은 매우 제한된 성생활을 가졌었다. 그의 전기를 쓴 어네스트 존스에 의하면 그의 성적 표현은 뒤늦게 (30세쯤에) 시작되어 일찍 (40세쯤에) 마감되었다. 프로이트는 41세가 되던 해 그의 친구 빌헤름 프리쓰에게 쓴 편지에서 자기의 우울한 기분에 대해 하소연하면서 “성적 흥분 또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 나이쯤 해서 그의 성생활이 어느 정도 마감됐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즉, 프로이트는 그의 저서 <꿈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ream)에서 그가 40대였을 때 언젠가 한 젊은 여인에게 육체적으로 매혹 당해 반쯤은 자발적으로 그녀에게 손을 뻗혀서 그녀와 접촉을 가졌다고 보고했다. 그는 자기가 <아직도> 자기 자신 가운데서 그와 같은 매혹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무척이나 놀랐다고 언급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성욕에 대한 통제와 성욕의 다른 방향으로의 나타냄을 믿었다. 그는 이러한 통제와 나타냄이 문화의 발전과 그 사람 자신의 성격 모두를 위해 특수한 가치를 가진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1883년, 마르다 베르네이즈와의 긴 약혼 기간 동안에 젊은 프로이트는 미래의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보냈다.
‥‥‥ 대중이 그들 스스로를 향락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즐거운 일도 지덕 (知德)을 기르는 일도 아니오. 우리는 적어도 그와 같은 짓에 흥미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오‥‥‥ 나는 가극 카르멜의 상연을 관람하는 동안에 내게 떠오른 어떤 것을 기억하고 있소. 군중은 자기의 욕망을 발산시키는 반면에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를 거부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오. 우리는 우리들의 고결성을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를 박탈하며, 우리의 건강, 우리의 향수(享受) 능력, 우리의 정서를 낭비하지 맙시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무엇인가를 위해 우리 자신을 저축해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끊임없는 자연적 본능의 억압은 우리에게 우아한 품위를 가져 다 줄 것입니다. ‥‥‥ 그러나 우리들처럼 극단적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삶과 죽음에 함께 묶어 놓으며, 충실한 채로 남아 있기 위해 수년간에 걸쳐 스스로를 거부하고 그리하여 파리해지며, 아마도 그들에게서 그들의 사랑하는 이를 박탈해간 파국을 헤치고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
프로이트의 승화라는 교의는 인간 개개인 속에 일정량의 리비도가 존재하며, 당신은 당신 자신을 거부할 수 있고, 즉 다른 즐거움을 크게 하기 위해 정서를 <경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만약 당신이 직접적인 성욕을 위해 리비도를 소비해 버린다면 그것을, 예컨대 예술적 창조와 같은 데에 유효하게 사용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다. 프로이트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폴 틸리히는 “승화라는 개념은 프로이트의 가장 청교도적인 믿음이다”라고 비평한다.
그러나 내가 정신분석과 청교도주의 간의 관련을 지적하는 것은 단순히 정신분석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가치 판단을 내리고자 함이 아니다. 가장 고양되었을 무렵의 청교도운동, 즉 19세기말에 빅토리아풍의 도덕적 장벽으로 전락하기 전의 원래의 청교도운동은 고결성과 진실성에 헌신하는 찬양할 만한 성격을 그 특성으로 하고 있었다. 근대 과학의 진보는 그러한 청교도 정신에 크게 힘입었으며 과학 실험실에 매달렸던 세속적 수도승들의 그러한 덕성이 없었다면 아마도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정신분석 같은 문화적 발전은 항상 원인이자 동시에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즉, 정신분석 같은 문화적 발전은 문화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경향을 <반영>하고 <표현>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경향을 만들어내고 그 경향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무엇이 진행돼 나가고 있는지를 인식할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그 경향의 방향에 대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우리들의 새로운 문화적 상황에 상응될 새로운 가치들을 희망을 갖고 발전시킬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우리의 가치의 내용을 정신분석으로부터 취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 가치들 자체의,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자아상(自我像)의 혼란된 모순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정신분석에게 우리의 가치들을 제공해 주는 역할까지 떠맡기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정신분석은 이전에 부정됐던 동기와 욕구들을 밝혀내고 의식을 확대시킴으로써 환자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가치들을 찾아내도록 길 안내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결코 어떤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가치를 결정할 짐까지 질 수는 없다. 프로이트의 크나큰 공헌은 그가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결과적으로 새로운 절제, 즉 억압된 무의식적 동기의 절제를 포함하고 있는 깊이에까지 끌어들인 점이다. 그는 또 전이(轉移)와 저항이라는 개념에 기초를 둔 정신요법에 있어서의 인간관계의 기술을 발전시켰는바 이 수준을 의식적 인식에 이르도록 했다. 정신분석의 인기가 올라가든 내려가든 간에 프로이트의 발견과 이 분야에서의 다른 사람들의 발견이 심리학적 치료의 영양뿐만 아니라 위선의 찌꺼기와 자기 속임을 일소하는 도덕성에 대해서도 한없는 공헌이란 점은 진실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명백히 밝히고자 하는 것은 <자기의 성격이 자동적으로 변하는 열반(nirvana)>을 열망하고 자기의 마음을 기술적 과정에 넘겨줌으로써 생기는 책임감으로부터의 회피를 바라는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운 표현>과 쾌락주의라는 그들의 가치를 내세우나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그들의 옛 청교도주의에다 단순히 정신분석으로부터 밀수입해온 새로운 내용을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성적 태도와 관습의 변화가 그렇게도 급격하게 ― 실질적으로 1920년대의 10년간 ― 에 일어났다는 사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성격 보다는 의복과 역할을 변화시켰다는 가정을 입증해 준다. 즐거움과 정열과 사랑의 의미를 풍부하게 하기 위한 감각과 상상력의 개방이 누락됐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감각과 상상력을 기술적 과정에 떠맡겼던 것>이다. 이런 종류의 <자유로운> 사랑 속에서는 사랑을 배울 수 없으며 자유는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족쇄가 된다. 그 결과 우리들의 성적 가치들은 혼란과 모순에 빠져들었고 성적 사랑은 거의 해결이 불가능한 지금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패러독스를 드러냈다.
나로서는 그런 점을 과장하고 싶지도 않거니와 성적 관습에 있어서 최초의 변화가 지니는 긍정적인 이점(利點)들도 놓치고 싶지 않다. 우리가 묘사하고 있는 혼란들은 진정한 개인적 자유의 가능성 또한 동반하고 있다. 부부는 섹스가 쾌락과 기쁨의 원천임을 확인할 수 있고, 자연적 행위로서의 섹스가 죄악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더 이상 쫓기는 일 없이 관계를 하면서 서로 상대방을 조작(操作)하는 등의 실질적 죄악에 대해 보다 민감해질 수 있다. 그들은 빅토리아시대에는 결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게 그들의 관계를 풍요롭게 만들 여러 가지 방법을 탐구할 수 있다. 점점 늘어나는 이혼의 빈도조차도, 그것이 야기하는 문제들이 아무리 차고 엄숙한 것이라 할지라도, 부부에게 그들이 상대방에게 <고착된> 존재라는 독단에 의해 잘못된 결혼을 합리화시키는 일을 보다 어렵게 만드는 긍정정인 심리학적 효과를 갖고 있다. 새로운 여인을 찾아도 된다는 가능성은 동시에 우리가 그녀 또는 그 남자와 함께 살 경우에 가져야 할 반려자 선택의 책임을 보다 더 절실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거기에는, 한편으로 생물학적 욕정과 다른 한편으로 의미 있는 관계에의 갈망, 상호간의 깊은 인식, 그리고 이른바 인간적 이해의 다른 면 사이의 중간에 서는(그리고 둘 다 포함하는) 용기의 발전 가능성이 있다. 용기는 단순히 사회의 관습과 싸우는 것으로부터 자기의 자아를 다른 인간에게 동참케 하는 내적 능력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현재에 있어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듯이 이러한 긍정적 이점들이 자동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논의해 온 모순들이 이해되고 해결될 때라야만 가능해진다.
1.5. 문제의 동기
나는 두 곳의 정신분석 진료소에서 분석가의 자격으로 정신분석가가 되기 위해 수련 중인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 또는 심리학자들을 지도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이들 여섯 명의 수련의들이 담당하고 있는 환자들의 보기를 인용하고자 한다. 이제 그 환자들에 대해 상당히 많이 알게 되었고, 내 환자들이 아닌 까닭에 보다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환자들 각자는 표면상 부끄러움이나 죄책감 없이 ― 그리고 일반적으로 다른 짝들과 ― 침대로 간다. 여자들(여섯 명의 환자들 가운데 네 명은 여자다)은 모두 성행위에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진술한다. 그들 가운데 두 여자의 침대로 가는 동기는 남자에게 의지하고, 성관계란 어떤 단계에서 <당신이 하는 것>이라는 기준에 따라가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여자는 관대성(generosity)이라는 특수한 동기를 갖고 있다. 그녀는 동침하는 것을 자기가 남자에게 주는 멋진 어떤 것으로 보며 그 대신 남자더러 자기를 보살펴 달라는 어마어마한 요구를 한다. 네 번째 여자는 정말로 성적인 강한 욕망을 경험하는 유일한 환자로 보이는데 그녀의 동기는 남자애 대한 관대성과 분노(“나는 그 녀석으로 하여금 내게 즐거움을 주도록 만들겠다.)의 복합이다. 두 명의 남자 환자들은 원래 성불능 자였다. 지금은 비록 성교를 할 수는 있지만, 아직도 주기적으로 성적 능력에 어려움을 느끼는 상태다.
그러나 현저한 사실은 그들이 결코 자기들의 성관계에서 많은 <흥분>을 얻는다고 보고하는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의 섹스에 몰입하는 주된 동기는 그들의 남성다움을 과시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 남자 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의 특수한 목적은 그의 행위가 그럴듯한 것이든 빈약한 것이든 사랑의 행위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일종의 남자들 사이에 은밀히 자신감을 드러내 보이는 행위로서 전날 밤의 모험을 담당 분석가에게 얘기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그러면 이러한 모형들 속에 갈려 있는 동기가 과연 무엇이며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섹스에 대한 이전의 강박적인 부정 대신에 오늘날과 같은 섹스에 대한 강박적인 몰입으로 몰아가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우리들의 탐구를 보다 심화시켜 보자.
중심적 동기는 베티 프리단이 <여성의 신비>(The Feminine Mystique)에서 명확히 밝힌 바와 같이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의 목표이기도 한 자기의 정체성을 입증하려는 투정임이 틀림없다. 이것은 섹스의 <평등주의>라는 이념과 성적 역할의 <상호 교환 가능성>(interchangeability)을 생성시키는데 일조했다. 평등주의는 최소한 남녀 사이의 기본적인 생물학적 차이점뿐만 아니라 성행위의 많은 기쁨을 가져오는 정서적 차이점의 희생에 매달리고 있다. 여기서 자기모순은 자기가 자신의 파트너와 동일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강박적 욕구가 당신 자신이 스스로의 독특한 감성을 억압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이 바로 당신 자신의 정체성의 밑바탕을 허무는 것이 라는 점이다. 이러한 모순은 우리로 하여금 침대 속에서까지도 기계가 되도록 하는 우리 사회의 경향에 이바지하고 있다.
또 하나의 동기는 스스로의 고독감을 극복하려는 개인의 희망이다. 이것은 공허감과 무감동의 위협으로부터 도피하려는 필사적인 노력과 연관되어 있다. 쌍방 모두 상대방의 육체 안에서 응답해 오는 전율을 기대하며 헐떡거리고 전율하는데 이것은 자기 자신의 것이 죽지 않았음을 입증하려 함이다. 그들은 반응을 추구하며 이는 상대방이 그들의 감성이 살아 있음을 입증해 주기를 기다리는 갈망이다. 옛날에는 자만심에서 이것을 사랑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우리는 가끔 남성이 지향하는 성적 무용(武勇)에서 남자들이 섹스 운동선수가 되기 위해 훈련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렇다면 그 경기의 최고상은 무엇인가?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자기들의 성적 위력을 입증하려고 투쟁한다. 그들 역시 시간표에 맞춰야 하고 정열을 보여야 하며 허풍스러운 오르가즘을 가져야 한다. 이제 정신요법계에서는 역학적으로 정력에의 과도한 집착은 일반적으로 성불능감을 대신 보태어 채우려는 것이란 점이 널리 인정되고 있다. 이 모든 다른 영역에서 정력을 입증하기 위한 섹스의 사용은 성행위의 기술을 점점 더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기이한 자기 패배의 모형을 관찰할 수 있다. 즉, 섹스 행위의 기술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실제에 있어 성감의 감소와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테크닉은 바보스러운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 하나는 성교 전에 남성 성기에다 마취 연고를 바르는 짓이다. 이렇게 감각을 감퇴시킴으로써 남자는 자기의 오르가즘을 보다 오래 끌 수 있게 된다. 나는 동료로부터 조기 사정 <조루증>에 대해 이 같은 마취 <요법>을 처방하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쉼멜 박사는 “한 남자 환자는 사정이 삽입 후 10분 이상이나 지난 뒤에 이뤄지는 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조기 사정>에 대해 절망하고 있었다. 비뇨기과 의사인 이웃 사람이 성교 전에 마취 연고를 바르도록 권장했다. 이 환자는 그 해결책에 대해 완전한 만족을 표시했고 그 비뇨기과 의사에게 몹시 고마워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즐거움을 기꺼이 포기하면서라도 오직 자기가 유능한 남성임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내 환자 중의 한 사람도 조기 사정 문제를 가지고 의사를 찾아갔는데 마취 연고를 사용하라는 처방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쉼멜 박사의 경우와 같이 나도 그 환자가 그와 같은 해결 방법을 아무런 의문과 갈등 없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대해 무척이나 놀랐다. 그 치료법이 결과적으로 그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고 보다 멋진 성교를 행하도록 해주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를 찾아왔을 그 당시 그 젊은 남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성불능이었다. 그는 심지어 드라이브하는 도중에 그의 부인이 구두를 벗어 그의 머리를 내려치는 지극히 여자답지 못한 행동조차도 다룰 수 없는 정도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어찌되었든 그 남자는 끔찍스러울 만큼 풍자화 된 결혼에서 꼼짝없이 성불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역설적인 얘기지만 전에 마취 연고를 발라 무감각해지기 전의 그의 성기만이 충분히 적절한 의지를 지닌 <감각>, 즉 가능한 한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각>을 갖춘 유일한 기관인 것 같았다.
성교를 좀 더 잘하기 위해서 자아를 <더욱 무감각하게>만들다니! 이것은 생생한 만큼이나 섬뜩한 것이며 우리 문화의 그렇게도 많은 격분이 얽매어 있는 악순환의 상징이다. 자기의 정력을 과시하면 할수록 그는 그만큼 더 성관계를(모든 행위 중에서 가장 친밀하고 개인적인 이것을) 외적 요건에 의해 판단되는 행위로 취급하게 되며, 그때 그는 그만큼 더 스스로를 틀고, 맞추고, 조종되는 기계로 보게 되며, 자기 스스로와 짝에 대해 그만큼 더 적은 분량의 감성을 갖게 되며, 감성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그만큼 더 많이 순수한 성욕과 성적 능력을 잃게 된다. 이러한 자기 패배 패턴의 결말은 결국에 가서 <가장 유능한 연인은 또한 성불능인 연인일 것>이 라는 것이다.
그것이 설사 도착된 것이라 하더라도 짝을 <만족시켜 주는 일>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성행위의 건전하고 기본적인 요소의 표현이라는 것, 즉 자기의 짝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는 즐거움과 자기 확신(self-affirmation)의 체험이라는 것을 상기할 때 우리의 논의에서 빼놓고 지나칠 수 없는 점이 있다. 남성은 때때로 그녀 스스로를 그에 의해 만족되도록 하는, 흔히 이런 체험에 대해 상징적으로 쓰이는 말투를 사용하자면, 그로 하여금 그녀에게 오르가즘을 주도록 하는 여성에 대해 대단히 고마워한다. 이것은 <욕정>과 <애정> 사이, <섹스>와 <아가페> 사이의 중간 지점이며 이 양자를 함께 지니고 있다.
많은 남성들은 그가 여성을 만족시켜 줄 수 있을 때까지는 우리 문화 속에서 하나의 남자로서나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느낄 수 없다. 상호 인간관계의 실제 구조가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만약 남자와 여자가 상대방을 만족시켜줄 수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다면 성행위는 충분한 즐거움이나 의미를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흔히 강간하는 자의 강탈적 성욕과 돈 쥬앙 식으로 유혹하는 자의 강제적 성욕의 밑바탕에 흐르는 것은 상대방의 만족에서 얻어지는 그러한 즐거움을 체험할 수 없는 무능력이다. 돈 쥬앙은 그가 아주 정력적이고 기술적으로 기막힌 오르가즘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행위를 되풀이하고 다시 되풀이해야 된다.
이제 문제는 상대방을 만족시키려는 욕망과 욕구가 아니라 이 욕구가 성행위를 하는 인간들에 의해서 육체적 감동을 주는 기술상의 뜻으로만 해석된다는 사실인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서조차 빠진 것은 감수성을 주고 환상을 나누며 내적인 마음의 풍요를 제공해 주는 경험이다. 그리고 이런 행위들은 보통 약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으며 <감각으로 하여금 정서로>, <정서로 하여금 애정과 때로는 사랑으로> 고양될 수 있게끔 한다.
섹스의 기계화를 지향하는 오늘날의 경향이 성불능의 문제와 상당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계의 두드러진 특징은 모든 <동작>을 다 할 수는 있지만 결코 <느낄> 수는 없다는 점이다. 정신분석을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성불능이라고 말한 어떤 유식한 의과 대학생은 한 계시적인 꿈을 꾸었다. 그는 꿈속에서 나에게 파이프 하나를 자기의 머리에 꽃아 몸통을 뚫고 페니스처럼 다른 쪽 끝으로 나오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꿈속에서 그 파이프가 경탄할 만큼 강하게 발기하리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닳고 닳은 우리 시대의 이 지성적인 후배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그가 해결책이라고 생각한 것이 바로 자신이 가진 문제의 원인이라는 사실>, 즉 <나사로 죄는 기계>로서의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이해다. 꿈속에 나타난 그의 상징은 놀랄 만큼 사실적인 묘사이다. 두뇌, 말하자면 지성은 채워져 있지만, 소외된 우리 시대의 참다운 상징, 즉 그의 빈틈없는 체계는 정서의 서식처, 시신경상(視神經床), 심장과 폐, 그리고 심지어 위장까지로 철저히 우회한다. 머리로부터 페니스까지의 직통 거리이다. 그러나 거기서 잃어버린 것이 심장인 것이다.
나는 현재의 성불능 사태를 과거와 비교할 통계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며 내가 알기로는 그런 자료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인상으로는 모든 면에서 얽매이지 않은 자유에도 불구하고(또는 그 자유 때문에) 오늘날 성불능은 증가 일로에 놓여 있다. 이것이 성불능의 전파가 실제로 증가됐다는 점을 나타내는지 또는 단순히 성불능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의식과 능력이 커졌음을 나타내는지 명백하게 밝혀낼 수는 없지만 모든 임상의들은 더욱 많은 남자들이 성불능 문제로 찾아온다는 점에 동의한다. 분명히 이것은 그에 관한 의미 있는 통계자료가 거의 입수 불가능한 주제들 중의 하나다. 값이 비싸고 허풍스레 씌어진 책임에도 불구하고 성불능과 불감증을 다룬 저서 <인간의 성적 반응>이 그렇게도 여러 달 동안 베스트셀러 명단의 거의 맨 꼭대기에 올라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성불능에 대해 도움을 얻고자 하는 충동이 많다는 충분한 증거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나이든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젊은이들도 <바로 이것>이라고 해답을 제시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새로운 청교도주의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기묘한 방식을 알려면 주로 대학생과 성직자들에게 평판 좋게 팔리는 저명한 잡지인 <플레이보이>한 권을 펼쳐보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서 당신은 저명한 작가들의 글과 나란히 실려 있는 풍만한 가씀을 지닌 벌거벗은 여자들을 발견하고서 단번에 그 잡지가 새로운 계몽의 편에 서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조금만 더 자세히 보면 그 사진 속의 여자들에게서 그 말의 부정적 의미에서 전형적인 정신분열증적 성격인, 괴리되고 기계적이고 무덤덤하고, 공허한 이상스런 표정을 볼 수 있다. 당신은 그녀들이 조금도 <섹시>하지 않으며 <플레이보이>잡지가 다만 무화과나무의 잎을 음부로부터 얼굴로 옮겨놨을 뿐이라는 점을 발견한다. 그리고 당신이 「편집인에게 보내는 편지」란을 읽게 되면 맨 먼저 「플레이보이 성직자」라는 제목 밑에 “젊은 독자들과 수많은 성직자들에게 헤프너의 철학을 강의하고 참된 기독교적 윤리와 도덕은 헤프너의 철학과 상반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목사관(牧師舘)에 사는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유행에 따라 금욕주의자보다는 플레이보이처럼 산다.”고 열렬히 주장하는 어느 성직자의 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란에는 또 막달레나와 좋은 음식과 좋은 몸차림을 사랑했고 바리새인들을 질책했기 때문에 「예수는 플레이보이였다」는 제목의 펀지도 있다. 여기서 당신은 이 모든 종교적 정당화란 과연 무엇인가, 만약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사람들은 왜 자기들의 해방을 바르게 향유하지 못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 편집인에게 보내는 편지들은 편집진에서 <심어 놓은> 것이라는 냉소적 견해를 취하든 수백 통의 편지에서 가려진 것이라는 보다 관대한 견해를 취하든 간에 그것은 결국 동일한 것이다. <플레이보이>지에는 미국 남성의 이미지가, 유행에 따른 자기의 옷에 붙은 장식 따위와 같은 <플레이보이 액세서리>로 여자를 간주하는 상냥하고, 공평하고, 자신에 찬 독신으로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플레이보이>지가 이러한 이미지를 손상시킬 탈장환자라든가 대머리들을 위해서는 그 어떤 광고도 싣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솔직히 말해서 입맛에 맞는 보조자를 구하여 그에 상응하는 돈을 지불하고자 하는 편집자에 의해 매수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훌륭한 논문들이 이러한 남성 이미지에 권위를 제공해 주고 있다.
저명한 신학자 하비 콕스는 <플레이보이>지는 기본적으로 반(反) 섹스적이며 “인간이 인간적이기를 계속적으로 거부하는 데 있어서의 가장 최근의 가장 교활한 에피소드”라고 결론짓는다. 그는 “ <플레이보이>는 새로운 증류의 독재라는 무서운 사실을 생생하게 나타내는 전체적 현상의 일부분이다” 믿고 있다. 시인이며 사회학자인 캘빈 허튼도 <플레이보이>지를 유행과 오락의 세계와 관련시켜 논의하면서 이 잡지를 새로운 성적 파시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사실 <플레이보이>지는 미국 사회의 중요한 어떤 것을 간파하고 있는데 하비 콕스는 그것이 “여자에의 휘달림에 대한 억압된 공포”라고 믿는다.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은 새로운 청교도주의의 한 예로서 미국 남성에 있어서 그 휘말림에 대한 공포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억압된 불안으로부터 활력을 얻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성불능에 관한 억압된 불안이다. 그 잡지의 모든 것은 전혀 시험이나 이의 신청에 회부되는 일 없이 <정력의 환상>을 조장하기 위해 아름답게 조작되어 있다. 휘말리지 않는 것은 플레이보이들의 이상적 모델로 끌어올려져 있다.(냉정한 것처럼 연기하는 것과 같은) 이것은 그 환상이 자기들의 정력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남성들을 만족시켜 주고 그리고 이런 불안을 이용하리만큼 완벽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환상의 성격은 <플레이보이>지의 독자수가 실제로 여성을 상대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인 30세 이후에 뚝 떨어진다는 사실에서 더욱 알 수 있다. 이런 환상은 전에 주일학교의 교사로 열렬한 감리교 신자의 아들이었던 헤프너 자신이 북부 시카고에 있는 자기의 거대한 왕국을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거기에 숨어서 그는 플레이보이 클럽의 미녀들에 둘러싸인 채, 알코올 성분이 없는 펩시콜라의 향연 속에서 일을 수행한다.
코멘트에서 계속 ...


사랑의 행위를 하려는 욕구를 제외하고는 그 행위 속에 나타나 있는 거의 모든 동기가 위에서 진술한 바와 같이 혼란에 빠져 있는 마당에 감수성이 감퇴되고 정열이 거의 소멸지경에 이르도록 감소되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감수성의 줄어듦은 때때로 기계적 측면에서의 성행위를 매우 훌륭히 행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이제 마취연고가 필요 없는) 일종의 감각 마비 증세로 나타난다. 우리는 “우린 사랑의 행위를 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탄식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시인들은 우리의 환자들과 똑같은 것을 말해 준다. T.S. 엘리엇은 그의 시 「황무지」에서 “사랑스러운 여자가 몸을 뉘여 행위를 하고” 차 마시는 시간에 그녀를 유혹했던 빨간 코의 상점 직원이 떠난 뒤,
그녀는 돌아서서 잠시 거울을 들여다본다.
떠 나간 연인은 생각하지도 않고
하나의 희미한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자 이제 끝났다. 끝나서 다행이다.”
아름다운 여인이 어리석은 행위를 하고
다시 홀로 방안을 거닐 때
그녀는 자동적인 손으로 머리칼을 매만지고
축음기에 레코드판을 걸어 놓는다.
(Ⅲ부 : 249~256행)
라고 쓰고 있다. 데이비드 리스만은 그의 저서 <고독한 군중>에서 “섹스란 마지막 미개척지”라는 의미심장한 구절을 사용했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제럴드 사이크스는 “시장 조사 보고서, 시간 연구, 세법, 진로 실험 분석 등으로 잿빛이 된 세상에서 반항아들은 섹스가 유일한 초록색임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열정, 모험, 그리고 자신의 힘을 통한 시도.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남과의 관계 안에서 감성과 경험이라는 넓고도 흥미로운 새 영역의 발견. 이것들에 수반되는 자아 확인이 <미개척된 경험들>이라는 점은 사실 확실히 맞는 말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든 사람의 사회 심리적 발전의 일부로서 성(sexuality) 속에 바르게 정상적으로 존재해 있다. 우리 사회의 섹스는 실제로 대부분의 다른 모든 활동이 <타자 지향적>으로 되고, 몹시 지치고, 모험과 열정이 결여되던 1920년대 이후의 수십 년 동안 그런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그중의 하나는 섹스 혼자서 실제적으로 다른 모든 영역에서의 자아 확인 책임까지 떠맡아야만 했었다는 것이다) 미 개척지적인 신선감과 새로움과 도전이 점점 더 없어지게 됐다.
따라서 우리는 리스만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리스만의 <타자 지향적>(other directed) 행동, 즉 레이더처럼 반사적 생활 방식을 체험하고 있다. 이 마지막 미개척지는 우글거리는 라스베가스와 같은 도시가 되었고 전혀 미개척지가 아니다. 젊은이들은 성욕에서의 반항을 통해 더 이상 밀수입된 개인적 정체성의 감정을 얻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거기에는 이제 반항할 대상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약물 중독에 대한 연구에서 알게 된 사실은 그들이 부모에 대한 반항, 섹스로부터 얻어 왔던 사회적 “원기 왕성함”을 이제는 약물로부터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어떤 보고서는 학생들이 “섹스에 대해 일종의 권태감을 나타내는데 반하여 약물은 흥분, 호기심, 금지된 모험, 사회의 무한한 자유와 동의어로 본다.”는 것을 지적한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전에는 사랑의 행위로 불리던 것이 이제는 올더스 헉슬리의 예언적인 말 그대로 시답잖은 <손바닥에 손바닥을 합치는 것> 정도로 경험되고 있다는 사실, 그들이 우리에겐 시인들이 노래하던 것들의 의미를 이해 못 하겠다고 말한다는 사실, “우리는 같이 잤는데 그것 별로 좋은 게 아니던데요?"라는 말을 귀에 박히도록 반복해서 듣게 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더 이상 새로운 것으로 들리지 않는 것이다.
앞서 나는 반항의 대상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었는데 하나의 대상이 남아 있는바 그것은 섹스 그 자체다. 미개척지, 정체성의 확립, 자아의 확인은 성 전체에 대한 반항이 될 수 있으며 실제로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자주 그렇게 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러한 섹스에 대한 반항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섹스에 대한 반항이 ― 로봇의 의복을 입은 현대의 리시스트라타(Lysistrata: BC 4세기의 그리스의 조각가. 인간의 얼굴 표정을 석고로 조각한 최초의 조각가)가 ― 우리들 도시의 바로 문 앞에서 덜커덩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거나 또는 최소한 서성거리고 있다는 점이다. 성의 혁명은 마지막에 가서는 그것 스스로에게 환희의 비명소리가 아닌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되돌아온다.
이렇게 섹스가 더욱더 기계적으로 됨에 따라 정열은 모른 체하고 즐거움마저 줄어들면서 문제가 360도 회전하여 제자리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취적> 태도로부터 <방부(防腐)적> 태도로 진보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성적 접촉 그 자체는 이미 보따리에 싸여져서 선반 위에 올려지고 사람들은 그것을 회피한다. 이는 새로운 청교도주의의 또 하나의, 그리고 확신하건대, 최소의 건설적인 면으로서 마침내는 새로운 금욕주의로 되돌아간다. 이것은 또 어떤 대학 캠퍼스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보이는 매력적인 오행시(五行詩)에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학장이 그랬어.
가르치는 기계의 도움을 받아
오이디푸스 왕은
섹스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고.
여왕의 몸에는 손 한번 대지 않고서도.
다른 사람들 중에서도 마아샬 맥루한은 이러한 섹스에 대한 반항을 환영한다.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섹스는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맥루한은 쓰고 있으며, 레오나드도 “성의 개념, 이상, 실천은 이미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바뀌고 있다‥‥‥ 엄청난 가슴과 엉덩이를 구석구석까지 선명하게 사진 찍은 <플레이보이>지의 책갈피 속의 여자 모습은 사라져가는 시대를 단말마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서 맥루한과 레오나드는 새로운 섹스가 없는 시대에 있어서 에로스는 없어지지 않고 확산될 것이며, 모든 삶은 현재 예상되는 것 이상으로 에로스적이 될 것이 라고 예언한다.
이 마지막 보증은 참으로 믿음직한 위안을 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맥루한의 <현재>의 현상에 대한 예리한 통찰은 불행하게도 사실에 입각한 기초가 전혀 없는 이른바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거의 없는 <전종족주의>(前種族主義)라는 역사의 구조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는 무감동이 아니라 새로운 에로스가 남녀 구별시대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낙관적 예언의 근거를 하나도 제시하지 않았다. 사실 맥루한과 레오나드의 새로운 전자 시대(electronic age)에 대한 숭배에서 나온 이 논문 가운데에는 놀랄 만한 혼란이 있다. 여배우 소피아 로렌을 화가 루벤스의 작품에 견주어 보듯이 튀기(Twiggy,60년대 미니스커트 모델)를 엑스레이 사진에 견주어 보면서, 그들은 “이 여자의 엑스레이 사진은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가? 사실적인 사진은 아니지만 심오하게 얽혀 있는 영상이군. 뭐 독특한 여자는 아니고 그저 <인간>이군”이라고 말한다. 엑스레이 사진은 인간을 조금도 드러내주지 못하며 다만 고도의 전문가만이 판독할 수 있고 우리로서는 수천 년을 들여다본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고사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인간도(어떤 여자나 남자도) 결코 식별할 수 없는 비인간화되고 단편적인 뼈와 섬유질의 조각만을 보여 주는 것인데도 말이다! 미래를 <보증하는> 그러한 견해는 극단적으로 무서움을 주고 있으며 우울한 것이다.
그리고 도대체 나는 엑스레이 사진의 그 <새로운 사회>에서 누가 누군지, 그리고 누가 남자고 여자인지 판독하지 못하는 채로도 한가한 백일몽 속에서 튀기 보다는 소피아 로렌을 맘대로 선택하면 안 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우리들의 미래는 산타 바바라의 민주제도연구소에서 열린 이 주제에 대한 토론에 참석한 사람들에 의해 보다 심각하게 다져졌다. 그 결과를 기록한 「성의 구별이 없는 사회」라는 보고서는 “우리는 양성적(兩性的) 또는 다성적(多性的) 사회가 아니라 성의 구분이 없는 무성적(無性的) 사회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남자애들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여자애들은 바지를 입는다.……낭만은 사라질 것이다. 사실 그것은 이제 거의 사라져 버렸다‥‥‥ <연간 소득>이 보장되고 <피임약>이 주어질 경우 여자는 결혼을 택할 것인가? 무엇 때문에 결혼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솔직하게 사실에 접근하고 있다. 그 토론의 참석한 사람으로서 이 보고서를 쓴 엘레야노 가아드 여사는 더 나아가 자녀를 낳고 기르는 일에 일어날지도 모를 근본적인 변화를 지적한다. “수정란을 고용된 자궁 속에 이식할 수 있고 자손을 정액 은행으로부터 선택할 수 있는 시대는 어떠할 것인가? 여자들이 아직도 남편의 씨를 받아 임신하고 직접 아기를 낳을까?‥‥‥ 아무런 문제도 없고, 질투도 없고, 사랑의 전이도 없다.‥‥‥ 유리관 속에서 부화되는 자녀들은 또 어떨 것인가?‥‥‥ 공동체적 사랑(communal love)은 우리가 오늘날과 같이 자녀 양육에 의해 생겨난다고 믿는 인간성을 발전시킬 것인가? 이러한 조건 아래서의 여성들은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현세대의 미국 남성들과 같이 죽음 지향적 (death-oriented)이 되지 않을까?‥‥‥ 나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무서운 가능성을 생각하고자 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라고 그녀는 덧붙여 이야기한다.
가아드 여사와 같은 연구소의 동료들은 이 혁명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진정한 문제는 성기와 성기능 그 자체를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인간의 인간성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느냐라는 점임을 인식하고 있다.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생명 과학의 발전 속도에 따라 우리들의 인간성과 생명이 주는 성질이 사라질 현실적 가능성과 어느 누구도 생명과학의 발전이 선이냐, 악이냐에 관해 논의하고 그에 대한 대처 방안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라고 그녀는 호소한다.
이 책에서 우리의 논의의 목적은 바로 그와 같은 일이 나쁜 것이냐, 좋은 것이냐, 다른 대안이 없느냐 하는 의문, 즉 인간의 <인간적, 생명 부여적 성질>을 구성하는 것들을 파괴할 것이냐, 고양시킬 것이냐 하는 의문의 제기에 있다.